세차를 하지 못한 지 몇 달이 지났다. 하려고 마음먹으면 비 예보가 있었고, 딱히 차가 깨끗해 보여야 할 이유가 없었던지라 지저분해도 그냥 모른척했다. 그래서 은빛의 휠이 새까매지고, 빗 자국이 말라 생긴 흙먼지가 하얀 차체와 창문에 보기 싫은 흔적을 남긴 지 꽤 오래되었어도 그냥 방치... 오죽했으면 매일 내 차를 타고 다니는 아이들이 창피했는지 "엄마, 차가 너무 지저분한 거 아냐?"라고 할 정도였다. 아니 잠깐, 그 말을 하기 전에 너희들 방 상태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니니?
너무 반짝거리는 요즘 5월의 날씨... 미세먼지 없이 쨍한 햇살, 연하게 올라오는 연초록의 나뭇잎들... 온갖 반짝거리는 것들(심지어 지나가는 차들 조차도) 속에서 유독 내 차만 꾀죄죄 초라한 몰골로 느껴졌던 어느 날 안 되겠다 싶어 세차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몇 달 만에 맡겨보는 손세차인지... 아이들 픽업 시간을 피해 차를 맡기고 근처 카페에서 세차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난 몇 달을 꼼짝을 안 했을까?
손세차를 맡기고 오랜만에 여유를 부려 보려고 근처에 있는 카페를 찾았다. 주문을 하고 2층으로 올라갔더니 작은 테이블엔 공부하는 학생들,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들도 보였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기다리는 동안 챙겨 온 책을 보려는 야무진 계획을 가지고 나도 그들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이내 거슬리기 시작한 맨 안쪽 자리에 앉은 두 젊은이들의 목소리.... 벽으로 막힌 자리 특성상 그들의 대화 소리가 울리듯 들렸던 데다 굵고 큰 그녀들의 목소리는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컸다. 게다가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듣고 싶지 않은 그들의 인간관계 이야기라니 맙소사...
확성기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카페의 2층 공간에 그녀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해대는 데도 나 빼고 다들 괜찮은 건지 주변 사람들은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이어폰이 있어서 괜찮았던 걸까? 아무리 그래도 정말 너무 심했다. 카페라는 곳이 기본적으로 조용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옆 테이블의 소리도 듣게 되지만, 그래서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조심스럽던데... 주변이 시끄럽다면 몰라도 둘 빼고는 너무 조용했는데 어떻게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하면서 주변 신경을 전혀 쓰지 않을 수 있는 건지 의아했다.
출처 : Pixabay 주위는 상관없이 자기들의 이야기에 열중한 그녀들을 보며 기본적인 에티켓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보다 내가 꼰대라 그런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도 썩 맘에 들진 않았던 날... 조용함을 원하면 집에 있어야지 굳이 사람 많고 시끄러운 게 당연한 카페에 와서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에 시끄럽다고 불평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다시 생각도 해봤다. 그래도 그렇게 이해하기엔 정도가 심했다. 결국 책 읽기는 접고 핸드폰만 뒤적거리다 세차가 끝난 차를 가지러 나왔는데 내게 주어진 한 시간을 망쳐버린 기분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꼰대든 아니든 난 저러지 말아야지, 우리 딸도 저렇게는 키우지 말아야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그런 날이었다.
각자 타고나는 목소리는 다 다르다. 그리고 호감을 주는 목소리, 자꾸 듣고 싶은 목소리가 있다면 거슬리고 듣기 싫은 목소리가 있는 것도 분명 맞는 이야기다. 내가 유독 그녀들의 목소리가 거슬렸던 건 다름 아니라 바로 목소리의 크기 때문이었다. 목소리가 좋고 나쁘고 목소리의 톤이 높고 낮고를 떠나서 난 기본적으로 큰 목소리에 예민해진다.
우리 집에도 물론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엄마. 결혼 전에는 엄마 목소리가 크다는 걸 잘 몰랐던 건지 20년간 엄마랑 떨어져 살다 보니 우리 엄마 목소리가 이렇게 컸나 새삼스러울 때가 많다. 문제는 엄마 목소리의 크기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가끔 엄마랑 식당이나 카페에 갔을 때 엄마 목소리가 너무 크다 싶으면 주변에 눈치가 보인다. 그래서 엄마에게 목소리를 조금만 낮추라고 얘기하면 엄마는 그런 내 말에 또 기분 상해하신다. 코로나 이후로는 그럴 기회마저도 별로 없었지만... 그래서 엄마에게 목소리 이야기를 할 때는 엄마 기분을 살펴가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얘기하는데 어느 날은 엄마가 그런다 "나이 들어서 그래. 너도 나이 들어봐. 목소리가 점점 커져."
나이 들어서 점점 커지는 목소리라니 이렇게 슬픈 말이 있을까... 우리 엄마도 곱디곱고 야리야리하던 그 시절엔 개미 목소리처럼 작고 고운 목소리였을 거다. 살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속으로 삭이지 못한 말들을 내뱉기 시작하면서 점점 커졌던 목소리... 아이들 상대의 학원을 하시면서 주변 소리에 무뎌진 것도 이유라면 이유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나이 들수록 약해지는 청력에 자동으로 목소리가 커졌을 수도 있고... 엄마의 이런 큰 목소리를 그리워하고 듣고 싶어 미칠 지경인 날도 앞으로 분명 올 텐데 그땐 '목소리 큰 여자들'의 카테고리에 엄마를 넣었던 오늘의 나를 불효녀라며 원망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겠다. 나쁜 딸내미...
코로나 시국에 외출이 잦지 않았으니 사람들 틈에 나를 기워 넣는 일도 확실히 줄어서 그동안은 잘 모르고 살았었다. 그러다 조금씩 모임도 많아지고 나의 외출도 늘어나면서 무심코 들어간 곳에 사람이 지나치게 많거나 음악소리 내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면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린다. 속삭이러 카페나 술집에 가는 것은 아니니 어느 정도는 이해하더라도 지나치게 주변을 자극할 정도의 목소리 데시벨은 신경 쓸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내 목소리는 남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면서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게 이제와 조금 민망하지만 그래도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적어도 공공장소에서는 제발 목소리 톤을 낮춰줬으면 좋겠다. 내 기분에 따라 조절되는 목소리라면 크게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충분히 작게도 할 수 있을 테니까...
50대를 코앞에 둔 나 역시 나이 들어가는 중인데 이런 나도 세월이 더 지나면 그렇게 목소리가 커지게 될까? 나중은 모르겠지만 지금은 바라건대, 앞으로도 난 나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목소리 큰 여자는 되고 싶지 않다. 카페에 있던 그녀들을 보고 이 글을 쓰며 다짐한다. 오늘 이후로 공공장소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할 땐 내 목소리 데시벨에 더 신경 쓰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