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내게 잘하는 말이다. 보면 볼수록 침착하고 차분하다고... 사실 튀는 성격도 아닌 데다 조용히 내 할 일하고 밖에서는 어지간하면 큰 소리를 내지 않으니 어쩌면 차분하고 침착하다는 나에 대한 얘기들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나는 상당히 급하고 머릿속의 수많은 생각들로 쓸데없는 걱정이 많으며 스스로를 들들 볶아대는 안달복달형이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난 건지 어릴 때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빨리 끝내야 직성이 풀렸다. 어차피 해야 될 일이니 미룬다고 안 할 수 있는일도 아닌 데다 귀찮고 싫은 일일수록 빨리 끝낸다음 어서 빨리 해방의 자유를 느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학생 때의 공부도 그랬고 회사일도 마찬가지... 사실 잘 안 풀리는 일은 진행도 더디고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지만 조금이라도 그 스트레스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나는 나를 다그친다. 일이 끝나고 난 뒤 찾아오는 그 자유스러움과 금요일 밤 맥주 한잔의 시원함을 생각하며...
하지만 나와는 정반대의 아이들... 아들과 딸의 일반적인 차이 때문인지 딸은 그래도 아들보다는 정도가 덜 한편인데, 우리 아들은 정말 느긋해도 너무 느긋하다. 보고 있는 내가 갑갑증이 날 정도로... 고1인 아들... 학교 갈 준비도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몇 번을 깨워야 겨우 일어나고 나갈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도 준비가 느긋하다. 그런 느긋한 아들과, 답답해 죽을 것 같은 엄마 때문에 우리 집 아침 시간은 늘 전쟁터다. 불안하지도 않은지, 보통 시간 계산을 해 보면 지금쯤 어찌해야 할지 감이 와서 서두르는 척이라도 할 텐데 지각에 대한 두려움 따위... 없다. 내가 천하무적을 낳았나...
처음엔 나도 그 습관을 고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들을 다 써봤다. 부드럽게 깨워 보기도 하고 소리도 질러 보고, 세 개씩 되는 알람시계에, 욕실에 방수시계까지 걸어 뒀다. 그래도 이 아이... 서두르는 척도 안 한다. 얼굴에 로션 바를 거 다 바르고 얼른 준비하라고 하면 하는 중이지 않냐며 재촉하지 말라고 되려 큰 소리다. 그러니 늘 학교 도착 시간은 간당간당 아슬아슬... 나도 아침에 웃는 얼굴로 잘 다녀오라며 부드럽게 인사하는 우아한 엄마이고 싶다. 하지만 늘 허둥지둥 그렇게 아이를 내려 주고 나면 아침부터 진이 빠지고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채운다. 내가 버릇을 잘못 들였나? 사춘기라 잠이 많아 그런 건가? 시간관념이 그렇게 없나? 그 정도는 모르지 않을 텐데 대체 왜 맨날 저렇지?
약속 시간에 잘 늦는 법이 없는 나에겐 아들의 느긋한 시간관념은 도저히 이해 불가다. 학교 다니던 시절의 날 생각해 보아도 늘 자기 전에 다음날 학교 갈 책가방을 다 챙겨 놓았고, 지각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엄마가 학교에 데려다주는 거? 우리 땐 그런 거 없었다. 야자 후 밤늦게 끝나면 위험하니 그때는 데리러 오셨었지만, 학교가 아무리 멀어도 알아서 걸어갔었고, 아침마다 만원 버스 타고 다니는 일도 다반사... 늘 그랬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 집에서 학교 또는 학원까지 엄마가 라이더를 자처하며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니 내가 봐도 너무 편하게 사는데, 그게 어떤 건지 아이들은 절대 모른다. 그렇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하는 지도...
그렇다고 요즘처럼 험한 세상에 일부러 고생이 어떤 건지 해 보라고 내몰 수도 없는 일이고, 다른 아이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우리 애만 안 해줄 수도 없는 일이라 이런 경우는 부모로서 참 혼란스럽다. 나 역시 프리랜서로 일을 해서 회사 출근하는 날만 제외하고는 아이들 픽업을 한다. 어쩌다 일이 생겨 아이들이 버스를 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사실 할 것 많은 아이들 입장에선 이동시간도 길고 피곤한 일...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럴 때 난 또 왜 미안해지는지... 고생을 모른다면서 조금이라도 힘든 걸 보면 또 안쓰럽고... 이런 이중적인 내 모습을 보니 어쩌면 내가 더 문제일지도, 내가 잘 못 가르친 게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이달 중순쯤이면 아들은 1학년의 마지막 기말고사를 본다. 기말엔 과목수도 많으니 당연히 내 입장에선 한 달 전쯤엔 공부를 시작해야 계산이 맞다. 요즘 국영수 학원 안 다니는 아이들은 거의 없어 그 세 과목의 공부는 평소에 한다 손 치더라도 나머지 과목은 대체 어쩔 생각인지... 더군다나 주요 과목들도 시험날짜가 임박해지면 학원 숙제가 어마어마해서 다른 과목 공부를 할 시간은 더더욱 없는데... 시험을 한 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으면 할 거라고 대답은 잘한다. 하지만 늘 몸은 책이 아닌 핸드폰 아니면 침대와 함께...
온라인 수업기간에 시간관리 못하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복장이 터진다. 미우나 고우나 내 새끼, 내가 나은 아들인데 어쩌랴... 자기도 뭔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그렇겠지 싶어 당장 소리 꽥 지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누른다. 사춘기 아이에 대한 책들, 또 예전에 읽었던 아이들 심리에 대한 책들도 들춰보며 아이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아이의 행동도 참아보려고 하지만, 정말이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고, 결국엔 인내심에 한계가 와 내 속에 눌렸던 화가 터지고야 만다. 그동안의 노력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느새 치사한 말들만 내뱉고 온갖 찡그러진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는 마녀같은 엄마가 되어 버린다.
대학을 안 가겠다는 생각이 아닌 이상 이제 실질적인 고2인데 그러면 좀 움직여 주고 하는 척이라도 해줘야 맞지... 하고 싶은 말 다 참으며 사달라는 거 해달라는 거 군소리 않고 해 줬고, 기본적인 부모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삼시세끼 밥도 원하는 대로 대령했건만... 온라인 수업기간에 백수처럼 먹고 자고 핸드폰 보는 일이 다인 것 같은 아들의 생활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건 정말이지 너무 괴롭다. 정말 느긋한 건지 아님 느긋한 척하는 건지, 시험에 대한 걱정, 앞으로 본인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조금이라도 없는 건지 진심으로 묻고 싶다. 얼마 전 아들이 물었었다.
"엄만 초능력을 갖게 된다면 어떤 초능력을 갖고 싶어?"
"엄마? 엄마는 네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초능력을 갖고 싶어."
"그런 거 말고... 진짜 없어?"
"응. 없어. 난 네 마음속이 세상에서 제일 궁금해."
정말이지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초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자기도 하고 싶은데 뭐가 잘 안 돼서 그러는 건지, 앞으로 어떤 생각을 갖고 살고 싶은지 등등... 속시원히 알고 싶다.
사실, 느긋한 태도는 살면서 나쁜 게 아니다. 나처럼 전전긍긍, 아등바등하듯 살면 솔직히 괴로운 일이 더 많다. 남들보다 더 신경 쓰고 더 힘들고 나야말로 사서 고생하는 타입... 그래서 남들 반응도 신경 안 쓰고, 매사 여유롭고 느긋한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이해가 안 가다가도 내심 그럴 수 있는 태도가 부럽기도 하다. 내가 최근에 추구하게 된 삶도 어찌 보면 힘 빼고 살기, 느긋하고 여유롭게 살기인데 앞길 창창한 아들 앞에서는 느긋함은커녕 조급함이 앞선다.
사춘기 아이들은 기다려 줘야 한다는데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줘야 하는 걸까? 아들의 인생에서 지금 이 시간은 절대 두 번 오지 않는 시간... 나 역시 그 시간들을 거쳐왔기에 얼마나 힘들고 피곤하고 싫은지 잘 안다. 그래도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에, 이 시기를 잘 뛰어넘고 많은 기회를 만들어야 끌려가는 삶이 아닌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기에 느긋한 마음으로 마냥 기다려 주기가 힘들다. 기다림의 끝을 누가 알려준다면, 그 끝을 알 수만 있다면 그때부터는 군말 없이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는 진부한 말... 많이들 하지만 내겐 정말 짜증 나는 말이다. 물론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란 건 맞다.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건 내 인생의 키를 어떻게 쥐고 가느냐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은 후회 없을 만큼 공부를 해본 사람의 입에서 나와야 된다고, 그래야 변명이 아닌 설득력 있는 말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해야 할 것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 노력의 과정, 지금 아이가 보여줘야 할 것은 그것뿐이다. 먼 훗날 지금의 이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제일 크기에 엄마로서의 욕심을 부리는 거다.
여전히 늦잠 자고 늦게 일어나서도 맘 편하게 당당히 배고프다 외치는 아들에게 나는 오늘도 정성껏 차린 한 끼를 대령한다. 짜장 소스 곁들인 계란볶음밥... 아들아!! 밥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