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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의 칠인(七人)

-동화초등학교 교사 박무연 (ITAC-인천교대 산악부)

by 까미노

출근 시간을 넘긴 한적한 아파트 길가에 작달막한 체구의 중년 사내가 서 있다. 작지만 균형 잡힌 몸매와 가벼운 몸놀림에서 풍기는 기운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가늠케 한다. 이 사내가 30여 년 전 인수파와 선인파가 무공을 다투고 수많은 영웅호걸이 이름을 드높일 때,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한 토왕(설악산에 있는 우리나라 최장 길이의 빙벽으로 1986년 ITAC 신동걸 회원이 한국 최초로 로프를 사용하지 않고 단독 등반한 곳)을 단독으로 오른 사나이라는 것을 지나는 범인들이 어찌 알겠는가?


가끔씩 지나가는 차에 눈길을 주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잠시 후 검은색 소형 승용차가 사내 옆에 정차하고 호리호리한 오십 대 초반의 사내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커다란 짐 보따리를 싣고 미끄러지듯이 도심을 빠져나간다. 도심을 빠져나온 두 사내는 동쪽을 향해 달린다. 점차 멀리 차창 밖으로 고산준령이 나타나고 희끗희끗 잔설이 덮여 있는 것이 설악이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몸은 다 나았어?”

“네, 그만그만해요”

“그래도 조심해라.”


둘의 대화는 나지막하고 평온하게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하고 어느새 차는 한계령을 향해 구불구불 올라간다. 수차례 다녀간 듯 속세도 산속도 아닌 어중간한 곳에 제법 그럴듯한 산장에 차를 멈추고 짐을 내리는 중 먼저 도착한 듯한 일행이 밖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형님들, 이제 오셔요.”


두 사내와는 달리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기골이 장대하고 두상이 크고 얼굴빛이 붉은 것이 마치 장비, 항우, 노지심을 합쳐놓으면 저럴까 싶다. 몸만 크고 힘만 세면 장비이고 항우, 노지심인가? 그 또한 무공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부상 후유증인지 약간 다리를 절며 그 뒤를 따라 함께 인사하는 이는 육 척 장신에 지적인 외모에서 강인함이 묻어 나오는 인상이다. 앞선 사내와 달리 음성은 부드러운 미성으로 온화하며 뭇 여인네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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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인사하는 또 한 사내. 크지도 작지도 않고 비교적 왜소해 보이는 체구에 뚜렷한 턱선은 이 사내가 의지가 강하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정의로운 사나이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가 바로 저 악명 높은 개군단 5인방 중 하나다.


인사를 마치자 능숙한 솜씨로 각자의 무기를 챙겨 실폭으로 향한다.

실폭. 등반 폭이 좁아 붙여진 이름일 게다. 80-85도 정도의 경사에 3,40미터. 첫날 몸풀기로는 적당한 곳이다. 예년에 비해 올해는 얼음 색이 맑고 투명하다. 보통은 누런 황토물을 얼린듯했는데 말이다.


장비 같은 사내가 선등으로 줄을 깔아놓는다. 촉에 서황이 저만치 도끼를 잘 다루었을까? 그가 휘두르는 얼음도끼는 어김없이 얼음기둥에 바르르 떨며 처박히고 리드미컬하게 찍는 쇠발톱은 사다리를 딛고 선 듯 안정감 있다. 뒤이어 톱로핑으로 차례로 등반을 즐긴다. 이들이 등반하는 데는 말이 필요 없을 듯하다. 등반 중에 흔히 듣는 “출발 준비 완료, 출발, 타이트, 완료, 하강” 등등 대개는 군기가 바짝 들어간 구호 형식으로 외쳐대며 그저 물 흐르듯 차례 되면 올라가고 올라가면 내려오고... 가끔씩 실없는 소리나 해서 낄낄 대며 웃기나 하고. 얼핏 보면 당나라 군대 같은데 위험하거나 무리한 동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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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등반계의 초고수들인가?’


한두 차례 등반을 마친 후, 장비 같은 사내와 별 특징 없는 사내가 먼저 하산한다. 오늘의 별미 장어구이 준비를 위해서다. 불 피우고 모든 준비를 마치니 어느덧 주위는 어둠에 묻히고 눈 없는 겨울 설악은 사방이 고요하다.


“왜, 아직도 안 오는겨?”

“그러게요.”

“렌턴은 있냐~?”

“렌턴 챙겨 슬슬 가봅시다.”


개울 앞에 이르자 개울 건너편 어둠 속에 렌턴 불빛이 조심조심 내려온다. 불빛 뒤로 두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장어구이와 함께 술자리가 시작된다. 뒤늦게 합류한 또 한 사내까지 여섯 명이 나누는 이야기와 가끔씩 터져 나오는 호탕한 웃음소리만이 적막한 설악의 밤을 잠 못 들게 한다. 술잔이 돌고 술잔이 돌면 술병이 쓰러진다. 술병이 다 쓰러지고 나서야 사내들도 쓰러져 잠이 들것이다. 매년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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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등반은 소승폭포(설악산 국립공원 한계령 휴게소에서 북서쪽의 장수대 방면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빙벽). 폭포가 사납게 생겼다. 트리 모양의 눈부시게 하얀 빙폭에 햇살이 더해져 주변 검은 바위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아름답다. 그리고 두렵고 무섭다. 7시에 등반을 목표로 준비하려 했으나 좀 늦게 어프로치 해서 보니 시장 바닥이다. 코오롱 등산학교에서 중국인 강사요원 교육을 시킨단다. 모든 방면에서 새로운 아이템으로 생존 경쟁해야 살아남는 시대임을 절감한다.

‘난 참 행복한 놈이야’.


도저히 소승 등반은 불가하다 판단하고 내일 일정을 앞당겨 매바위로 향했다. 이곳은 한 팀만이 한가하게 노닐고 있다. 장비 닮은 사내가 익숙한 솜씨로 빈 곳에 자일을 설치하러 올라간 사이 자일 한 동을 숙소에 두고 온 것이 확인되었다. 생각해보면 중대한 실수다. 누가 누굴 탓할 것도 없이 조용히 일행 중 한 형님과 함께 숙소에서 자일을 공수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자세와 체력을 가늠하며 각자의 등반을 즐겼다. 이때까지도 머리 위에 환상적인 얼음왕국이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마지막 사내가 저녁에 합류했다. 오늘도 장어구이를 먹으리라는 착각으로 저녁도 굶고 왔는지 장어 내놓으라고 칭얼댄다.

“오늘은 장어 질려서 도저히 못 먹겠다.”

“깔끔하게 삼겹살?”

“코~올.”

“아~앙!, 장어, 장어 내놓으란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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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시간에 장비관리 및 등반 준비에 관해 서로 자아비판하는 시간을 가졌다. 거창하게 떠들지 않아도 충분하게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기에 조용히 마음속으로 잘못을 다잡는 계기가 되리라.


'내일 할 일을 오늘 하지 마라’ 내년 우리 반 학급 특색으로 정할까 보다. 오늘 할 일을 어제 해버렸으니 오늘은 뭐 하나? 늦게 온 사내가 당구만 치고 갈 수는 없다고 해서 다시 매바위로 향했다. 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며 등반을 마무리하려는데 무슨 마음에 선지 상수가 하강하지 말고 산 정상까지 올라 우회해서 걸어 내려오자 한다. 별수 있나, 다구인 듯 다구 아닌 다구 같은 상수가 하자는데.. 얼음 기둥을 넘어서는 순간 만화 겨울왕국이 그곳에 있었다. 기묘한 고드름이 빚어내는 환상적인 설국. 어쩌면 이곳을 우리만이 보았기에 더 아름답게 보였을까?

짧은 동계 등반. 나에게는 더욱 특별했던 동계일 수도 있지만 특별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앞으로도 특별하지 않은 어제 같고 작년 같은 산행 계속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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