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 45분.
지금 출발하면 문을 여는 9시에는 도착할 수 있다. 현관 앞에 세워진 자전거를 타고 갈까 잠시 망설이다 운동화를 고쳐 신고 승강기 하강 버튼을 누른다.
뉴스에서 ‘역대 가장 선선한 8월 아침 기온’이라는 기사를 본 탓인지 왼쪽 뺨을 지나 오른쪽 콧구멍을 스쳐 가는 가을바람이 꽤 시원하다. 불과 보름 전만 해도 이른 아침부터 이글이글 타오르던 날씨였는데 계절의 변화는 참 신비롭다. 하지만, 그 찬 공기는 지긋지긋한 계절성 비염을 불러와 재채기와 함께 맑은 콧물을 찍 쏟게 만든다.
‘816.7김64o’
코를 훌쩍거리며 서가를 위아래로 훑어봐도 책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종합열람실의 검색용 컴퓨터에는 같은 이름의 책이 여섯 권이나 ‘대출가능’이라고 되어 있는데 말이다. 검색대로 돌아와서 모니터 화면에 띄워져 있는 검색된 결과를 다시 보니 같은 책이라도 관내 도서관마다 청구기호가 달랐다. 내가 본 거는 다른 동네 도서관의 청구기호였고, 우리 동네 도서관은 ‘814.7김64ㅇㅎ’이었다. 같은 책이라도 도서관마다 청구기호가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해당하는 번호의 서가로 가서 겉 상태가 가장 좋아 보이는 것으로 뽑아 들었다.
다음은 커피숍이다. 미리 준비해 간 빈 텀블러를 바리스타에게 내밀며 뜨거운 아메리카노 더블샷을 주문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빵 가게에도 들려 우리 가족들이 좋아하는 빵들도 샀다. 늦잠 자고 일어난 아내가 거실에 나와 있다가 손에 들린 텀블러와 빵들을 번갈아 보고는 “왜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어?”라며 궁둥이를 두 차례 두드려준다.
빌려온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상하이 푸둥공항에서 비자가 없어 곧바로 추방당한 작가 본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책을 읽으며, 푸둥공항에서 당황스러웠을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그런데 한 가지 머릿속에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책에서는 공안 요원이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내가 아는 공안은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작가보다 10년 전인 1995년에 중국에 다녀온 적이 있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6주간 배낭여행으로. 그런데 첫 해외여행이자 낯선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은 가기 전부터 무척 긴장하게 했다. 톈진 공항에 도착하니 그 긴장감은 몇 배가 되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고무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 절정은 입국심사대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심사대까지 가는 동안에도 딱딱한 표정의 공안들이 보일 때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는데 입국심사대의 남자 공안은 여권 사진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다른 사람 아니냐고 물었다. 평소 사진이 실물보다 못 나온다(아니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모처럼 실물보다 잘 나온 사진이 있어 그것으로 여권을 만들었더니 이런 오해를 받나 싶으면서도 괜한 꼬투리를 잡아 어딘가로 끌고 가거나 무턱대고 많은 돈을 요구하면 어쩌나? 순간 오만가지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여러 명의 공안이 여권을 돌려보고는 같은 사람이라고 합의를 봤는지 한참 만에 뭐라 뭐라 하면서 입국심사 확인 도장을 쾅! 쾅! 쾅! 찍고는 여권을 돌려주었다.
배낭여행 중 백두산 천지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백두산에 가기 위해서는 연길에서 출발한 시외버스를 타야만 했다. 백두산(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부름) 입구에 도착하면 버스를 세우고 공안이 검문을 한다. 당시 중국은 자국민과 외국인은 화장실 요금도 다르게 받는 이중요금제가 시행 중이었는데 경비를 아끼려고 내가 자국민 버스요금을 내고 탄 게 문제가 되었다. 검문을 위해 버스가 멈춘 사이에 안내양이 공안에게 내가 자국민 요금을 내고 탔다고 고자질을 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공안이 직접 버스에 올라와 내게 물었다. 중국 어디에서 왔냐고. 공안의 말을 완벽하게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눈치껏 상황을 파악한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티엔진’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공안이 정말 톈진에서 왔냐고 다시 물었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옆자리 중국 친구가 이 사람은 한국인 유학생(유학생은 자국민과 같은 요금을 냄)이라고 대신 얘기해줘서 위기를 모면했다. 지금도 그 당시를 떠올리면 등골이 서늘할 정도다. 그러니 ‘중국 공안의 표정에서 부드러운 미소가 보였다’라는 작가의 글에 전혀 공감할 수가 없었다.
내년 2월 초에 가족이 함께 가는 것으로 후쿠오카 항공권을 예매했다. 현재 코로나 상황으로 봐서는 과연 그때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직 큰아들을 생각하며 일단 저질렀다. 고2 큰아들은 집 근처의 대학을 가기는 어려운 성적이다. 그렇다고 본인이 성적을 더 올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아들을 보며, 안타까움과 속상함이 우리 부부에게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억지로 공부를 시키고 싶은 생각은 더 없다. 자는 시간만 자정을 넘기지 않는다면, 컴퓨터 게임이나 휴대폰 사용에 대해 특별히 뭐라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난 지금이 제일 행복해”라며 자신 있게 말하는 큰아들이다. 이런 아들에게 굳이 ‘미래의 행복’을 운운하며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는 않다.
그런 큰아들이 또래에 비해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 있다. 일본어다. 학원을 보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들에게 누군가 일본어를 가르쳐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스승 삼아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며 독학했다. 어느 정도로 잘하는지 몰라 텔레비전에서 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틀어놓고, 뒤돌아서서 대사를 통역하라고 했더니 거의 비슷하게 우리말로 바꾸는 게 아닌가. 요즘은 학교에서 연결해 준 일본 고등학생들과 온라인으로 만나 가끔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아들이 원한다면 대학등록금으로 내야 할 돈을 일본 여행경비를 하라고 줄 생각이다. 굳이 학업에 뜻도 없는데 몇 년간 비싼 수업료를 내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배낭을 메고 일본 곳곳을 다녀왔으면 좋겠다. 그러다 혹시 자신에게 맞는 일거리라도 일본에서 찾는다면 금상첨화다. 혹여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온다고 해도 그 시간이 절대 헛되지는 않을 거라 확신한다.
대학 3학년 때, 6주간의 중국 배낭여행을 떠나면서 ‘대학 졸업 후 중국에 자회사를 둔 회사에 취업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삶이란 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대학 졸업 때 IMF 외환 위기 사태가 터지면서 인턴으로 들어간 회사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오게 되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교직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중국 배낭여행은 살아오면서 어떤 일을 도전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큰아들도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마음에 없는데 억지로 일본에 가라고 할 생각은 없다.
내년 2월 후쿠오카 4박 5일 여행 일정을 큰아들이 짜기로 했다. 4인 가족의 예상 총경비 안에서 숙소와 여행지, 교통편 등을 알아본다고 했다. 아직은 멀다고 생각하는지 항공권 예매했을 때의 호기에 비하면, 그 어떤 준비하는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아 살짝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저녁 9시가 넘으니 창밖의 서늘한 바람이 이번에는 오른쪽 뺨을 지나 왼쪽 콧구멍을 자극하고 스쳐 지나간다. 어김없이 재채기가 나오고, 콧물이 쏟아진다. 이놈의 비염. 후쿠오카 온천물에 전신을 푹 담그고 나면 싹 다 나았으면 좋겠다. 이래저래 내년 2월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