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거의 매일 울었다.
결혼 5년 만에 얻은 큰아들은 젖을 먹고 나면 자주 토했다. 토해서 금세 배가 고프니 자다가 깨서 또 젖을 달라고 울었다. 이렇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아이를 혼자서 안고 어르고 달래느라 아내는 점점 지쳐갔다.
결혼하고 2년이 지나면서 우리 부부는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였다. 아내는 산부인과, 나는 비뇨기과에서 각각 검사를 받았다. 나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는 자궁에 혹이 있어서 임신이 어려울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불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다. 그때부터 명의로 소문난 한의원을 찾아다녔다. 아내뿐만 아니라 처가와 시댁에서 보내준 한약이 집 한쪽에 첩첩 쌓여갔다. 하지만 그렇게 4년이 흐른 뒤에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친 아내는 돌잔치 초대를 받아도 가지 않았다.
“내가 가서 맘껏 축하를 못 해줄 거 같아.”
그때부터 우리는 입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유명 연예인 부부가 입양한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모습이 TV에 자주 소개되었던 것도 입양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에게 자식이 주어질 운명이 아니라면 괜히 무리하지 맙시다.”
아내와 힘들게 합의했고, 입양을 위한 절차를 알아보기로 했다.
퇴근하는데 아내가 ‘족발’이 먹고 싶다며 문자를 보냈다. 연애부터 결혼까지 10년 넘게 만났는데 아내가 먼저 족발을 찾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족발을 사 들고 갔더니 울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아내가 임신 테스트기를 내밀었다. 두 줄이 선명했다.
그렇게 큰아이가 찾아왔다. 더 녹을 애간장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애타게 기다리게 만들더니 태어나서도 아내를 힘들게 했다. 밤에도 큰아이는 깊게 잠들지 못했다. 두 시간이 채 못 되어 울기를 반복했다. 잠이 부족한 아내는 시도 때도 없이 울고 토하는 큰아이를 돌보느라 지쳐갔다. 당시를 돌아보며 아내는 “그때 산후우울증이었던 거 같아”라고 얘기한다. 결국 처가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처가와 200m 정도 떨어진 빌라를 얻어 이사했다. 집에서 학교가 멀어지니 근무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집이 있는 시흥시로 관외 내신을 냈다. 관외는 학교를 선택해서 쓸 수 없다. 하지만 중학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교육청 인사작업을 하는 선생님께 “가능하면 고등학교로 배치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그 요청이 어떤 과정에서 누락이나 거부가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A중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발령을 돌이킬 수 없으니 1년 만에 ‘학교 부적응’으로 고등학교로 옮길 생각이었다. 그래서 학교생활에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가장 하기 싫은 학생생활지도와 방송업무가 함께 주어졌다. 어찌어찌 시간은 흘렀고, 내신서 제출 기간이 되었다. 근처 고등학교에 알아보니 마침 자리가 있었다. 그 학교 교감을 소개받아 인문계 고3 담임의 경력을 내세워 구두 허락을 받았다.
“내신을 쓰기만 하면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편한 마음으로 내신서를 작성해 제출하려는데 교장이 나를 찾았다. 교장은 중학교 은사였다. 다짜고짜 내신 쓰지 말고 남아서 ‘교육정보부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내가 왜 고등학교로 가려고 하는지 다 아는 눈치였다.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로 가려는 이유가 단순히 업무가 힘들어서만은 아니었다. 같은 얘기를 수십 번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중학교 아이들을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히 더 컸다.
“교육정보부장 할 사람이 없으니 1년만 맡아줘.”
교장이 내민 손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다.
다음 해 2월 말, 업무분장 발표를 하루 앞두고 교육정보부로 가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었다. 학생부 관련된 것은 먼지 하나도 가져가고 싶지 않아 탈탈 털어가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교장이었다.
“내가 이런 말 하기 참 그렇지만 ….”
교장은 무슨 말을 꺼내려다가 한참을 망설였다.
“내일 업무분장 발표 못 할 거 같아.”
“왜요?”
“학생부장이 아직 안 정해졌어.”
학생부장은 전근해 온 지 2년 만에 부천으로 내신을 냈다. 그래서 아무도 발령이 날 거라 예상을 못 했다. 현임교 경력 2년으로 부천으로 들어간 전례가 없었다고 했다. 전혀 예상을 못 했기에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도 미리 생각하지 못했던 교장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경력이 가장 많은 교사부터 교장실로 불러 학생부장을 맡아달라고 요청을 했단다. 교장실에 불려간 10여 명의 고경력 교사들은 한결같이 힘든 사정을 얘기하며 거부를 했고, 어쩔 수 없이 다음 차례인 내가 불려갔던 것이다.
“올해 1년만 학생부장 좀 맡아줘. 지금 당신이 못 한다고 하면 우리 내일 업무분장 발표 못 해. 그러면 개학이 당장 코앞인데 학교가 난리 나지 않겠어?”
“교장 선생님, 저는 진짜 못합니다. 제가 왜 학교를 옮기려고 했는지 잘 아시면서 그러세요.”
교장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 지 알기에 서둘러 끊어야 했다.
“알지. 내가 잘 알지. 그래서 어렵게 부탁하는 거야. 옛 스승을 생각해서 올해 1년만, 딱 1년만 맡아줘.”
“그럼, 저도 생각할 수 있게 잠시 시간을 주세요.”
사제 간으로 얽힌 관계라 그 자리에서 더는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다. 교장은 그런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옆자리로 옮겨 앉더니 덜컥 손을 잡았다.
“○○아, 학생부장 언젠가는 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부탁할 때 딱 한 번만 해줘.”
결국 2009년 3월 2일, A중 교문에 다시 섰다. 그렇게 학생부장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해가 바뀌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사고를 저질렀다. 학교 근처 아파트에서 흡연하는 아이들에 관한 신고는 거의 매일 이어졌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도 학교 화장실과 후미진 곳에서는 어김없이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힘 약한 동급생이나 후배들에게 폭력을 일삼던 일진들은 이제 영역을 확장해 다른 학교 아이들과 집단 패싸움을 일으켰다. 하지만 교장은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매일 아침 교장실로 불러 똑같은 지시를 내렸다.
“용의 복장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학생은 절대로 교문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요.”
불과 며칠 전에 손을 잡고 학생부장을 맡아 달라고 얘기할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교직에 나오면서 종목을 바꿔가며 거의 매일 운동을 했기에 나름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학생부장의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는지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뜻대로 할 수 없어서 아내의 부축을 받아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무기력증’이라 진단했다. 아내는 안정을 위해 휴직을 권했으나 외벌이인 가장으로서 쉴 수는 없어 학생부장 보직을 내놓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일주일 병가를 내고 쉬는데 ‘2학기에 교장이 다른 학교로 간다’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2학기 개학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90도로 허리를 꺾어 교문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배꼽 인사’만 했다.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 “미친 거 아냐?”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 한 학기 인사만 하다가 뜨면 돼.’ 속으로 수십 번 다짐하며 버텼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내신 철이 되었다. 이번에도 내신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2학기에 새로 부임한 교장이 인터폰으로 불렀다.
“나도 학생부장 해 봤는데 말이야. 학생부장이라면 예전으로 말할 거 같으면 일명‘포도대장’이야. 근데 잘못된 애들 잡아서 지도할 생각은 안 하고 매일 교문에서 인사만 하고 있으니 학교가 제대로 돌아가겠어?”
교장은 자신이 부임하고 6개월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다짐을 해서 그동안 꾹 참고 있었다고 했다. 이제 학교를 옮긴다고 하니 선배 교사로서 충고를 해주고 싶어서 불렀단다. 그러면서 A4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최근 3년간 선도와 학폭 발생한 거 정리해 놓은 거야. 근데 교무보조 시켜서 그런지 뭐가 안 맞는 거 같아. 가져가서 다시 확인해 보고 가져와.”
표에는 3년 치 학생선도위원회와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의 개최 횟수와 관련 학생수, 조치사항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종이를 받아들고 학생부실에서 내부 결재한 서류들을 들춰보며 비교해 보는데 정리한 데이터가 틀리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 주신 거 확인해 봤는데요. 틀린 부분을 못 찾겠습니다.”
“그래? 근데 어떻게 올해 선도 횟수와 학폭 횟수가 줄어들었지?”
교장은 분명 내가 학생부장을 맡고 나서 아이들이 더 많이 규정을 어기고, 학폭이 훨씬 늘었을 것이라 짐작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3년 치 데이터를 막상 비교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아이들의 규정 위반뿐만 아니라 학폭도 늘지 않았고, 심지어 교문에서 배꼽 인사만 했던 2학기는 교문 지도를 심하게 했던 1학기보다 훨씬 관련 학생 수가 줄어 있었다. 그 이유를 교장도 궁금해했으나 그보다 더 궁금해 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래서 그 이유를 한참 생각하다가 다시 교장실로 찾아갔다.
“교장 선생님, 저 내신 안 쓰고 학교에 남아서 학생부장 다시 하고 싶습니다.”
2009년 9월, A중은 ‘교문지도’가 아닌 ‘교문 맞이’를 시작했다.
2010년 10월, 경기도는 전국 최초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ㆍ공포했다.
2014년 9월, 이재정 교육감은 ‘상벌점제 폐지’를 지침으로 내려보냈다.
2018년 11월, 문재인 정부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시민성을 키우는 교육을 위해 교육부에 ‘민주시민교육과’를 신설했다.
A중학교에서 학생부장으로서 했던 작은 움직임이 학생 생활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우리나라 ‘민주시민교육’의 시발점이 됐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A중에서 했던 학생 인권 존중의 여러 파동이 경기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A중에서 학생부장 역할을 했던 3년 동안 교육관이 많이 바뀌었다. 2010년 이전까지 교육의 중심이 학생이라고 외치면서도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나(교사)’를 먼저 생각했다면, 그 이후론 학생이 우선 되었다. 물론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언행으로 교사에게 심한 상처를 주는 아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권이 바뀌자 민주시민교육과가 폐지되고, 학생인권조례를 호시탐탐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멈춘 것도 아니다. 다만,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예전처럼 쉽게 흥분하거나 어른(교사)의 잣대로 판단하는 일은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교육감이 바뀌고, 교육부 수장이 바뀌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려는 정책이 쏟아지는 것을 보며 속이 상하고 울화가 치민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교육의 큰 물줄기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큰아이가 태어나 시흥으로 이사하게 된 것,
A중에서 우여곡절 끝에 학생부장을 맡게 된 것,
살기 위해 교문 지도가 아닌 교문 맞이를 하게 된 것,
경기혁신학교 정책과 함께 생활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
정부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시민을 키우는 교육을 추진한 것,
A중에서 시작한 나의 작은 날갯짓이 십여 년 흐른 뒤 우리나라에 민주시민교육이 태동하게 된 나비효과였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