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의 짧은 복도 건너편에 앉은 아들의 핸드폰을 살짝 엿본다. 어김없이 OTT에서 내려받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나오고 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시간만 나면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는 예비 고3 아들을 보면서 열불이 솟구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전혀 그런 울화가 치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열심히 보라고 권하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지난해 8월, 후쿠오카로 떠나는 가족여행 항공권을 ‘특가’로 구매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비자’가 있어야만 일본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결제가 끝난 며칠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은 자유여행은 불가능했다.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취소를 하려고 했더니 특가로 저렴하게 구매한 탓에 결제 금액의 상당 부분을 돌려받지 못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코로나 상황이 좋아져 비자 없이도 갈 수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 바람이 통했는지 겨울이 되기 전에 비자 없이도 90일 동안 체류가 가능하게 일본 정부의 방침이 바뀌었다.
이번 가족여행의 목적은 아주 단순했다.
‘예비 고3 아들의 일본어 실력 키우기’.
아들이 다니는 학교는 몇 년 전부터 일본의 고등학교와 자매결연을 하고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양국의 학생들이 왕래했었는데 아들이 입학한 후로는 학기당 서너 번 온라인에서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아들은 가끔 일본 학생들과 온라인에서 나눴던 대화를 들려주곤 한다. 그런데 정식으로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아들이 어떻게 일본 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랬더니 아들은 Zoom 녹화 영상을 가져다 보여줬다. 영상을 보니 우리나라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이 뜨문뜨문 대화를 나누는 데 그중 번역기를 이용하지 않고 대화를 하는 학생은 아들뿐이었다. 대학 입시가 코앞인 아들은 진학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우리 부부도 그런 아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자신이 필요하면 그때 알아서 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다만 뭔가 열정을 갖고 매달리는 것이 없어서 늘 안타깝고 속이 상했는데 일본어를 하는 아들을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비대면이 아닌 대면의 상황에서 일본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남들이 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무척 중요하다고 말하는 예비 고3의 겨울방학 기간에 우리는 일본에 여행을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예매할 때는 언제 돌아오나 싶었는데 마침내 그날이 돌아왔다.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해 우리는 렌터카를 빌려야 했다. 아들의 첫 번째 임무는 렌터카 회사까지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항 내에 있는 렌터카 회사의 부스에 가니 사람은 없고 인터폰만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로 상근하는 직원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부스에 있는 인터폰으로 연락을 하면 차가 있는 대리점까지 찾아오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했다. 우리는 렌터카 사무실 부스 앞에서 일제히 아들을 쳐다봤다. 아들도 이런 상황에 대해 사전에 얘기를 들었는지 망설임 없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누군가와 1분여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수화기를 내려놓은 아들의 목소리는 좀 전 자신감에 차 있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3번 출구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보인다는데”
아들의 말대로 3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으로 갔는데 렌터카 회사 표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줄 모르는 우리 가족을 보고 공항 직원이 다가왔다. 아들은 렌터카 회사 이름을 대며 우리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말하는 듯 보였다. 그러자 공항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강한 햇볕 아래에 있는데도 아들의 얼굴엔 짙은 어둠이 내려와 앉았다. 친절한 공항 직원이 다른 사람들에게 묻고 자신의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더니 1층이 아니라 3층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렌터카 직원이 인터폰으로 알려준 게 ‘3번 출구’가 아니라 ‘3층’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3층으로 와서 렌터카 사무실에서 보내준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들이 말했다.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거 같아.”
자유여행으로 몇 번 해외에 나갈 때 날짜에 맞춰 저렴한 항공권을 사는 것은 내 몫이고, 여행에 필요한 모든 일정을 짜고 예약을 하고 길을 안내하는 것은 아내가 도맡아 했었다. 그래서 해외에 가면 우리는 종일 아내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이번 일본 여행에서는 아들이 엄마의 역할을 해야 했다. 우리는 4박 5일 동안 일본 사람들과 대화할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아들을 쳐다봤다.
음식을 주문할 때도, 주문한 음식이 예상과 다르게 나왔을 때도,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할 때도, 숙소에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을 때도, 공항 가는 택시를 부를 때도 우리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거나 물끄러미 얼굴을 쳐다봤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여행과는 다르게 이번 일본 여행은 간단한 일본말도 거의 쓰지 않고 돌아온 거 같다. 일본어 번역기를 돌리는 것보다 더 빨리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아, 이제 일본 애니 본다고 뭐라 하지 않을게. 너 없었다면 이번 가족여행은 무척 힘들었을 거야. 올겨울에도 우리 일본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