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가 스페인 로그로뇨(Logroño)에 도착했다. 원래는 내가 로그로뇨로 가서 그를 만나 거기에서부터 같이 걸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하는 날까지 내가 로그로뇨에 도저히 갈 수 없다고 했더니 그는 중간 지점까지 마중을 나온다고 했다. 중간지점이래 봐야 15km는 걸어야 하는데 말이다.
6시에 로스 아르코스 숙소를 출발했다. 그가 내쪽으로 오는 거리를 최대한 줄여주고 싶어 일찍 길을 나섰다. 그래서 내가 20km, 그가 10km쯤 걸어와 비아나(Viana)에서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비아나에 거의 도달할 때쯤 당연히 그곳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모퉁이를 돌아 저 멀리 나타나는 게 아닌가.
5년 만의 재회. 그때 일주일 함께 걸었던 인연으로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5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오늘 벌어진 것이다.
그는 그때보다 조금 야위어 보였으나 여전히 까미노에선 나보다 훨씬 가볍게 걸었다. 그가 미리 예약한 숙소에 짐을 풀고 슈퍼마켓에서 장을 봤다. 오늘 저녁은 유럽에 온 기념으로 그가 꼭 사고 싶다고 해서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맛집에서 푸짐하게 먹었다.
게다가 평생 받기 어려운 선물도 그가 가져왔다. 여동생이 만들었다며 한글로 된 내 이름과 이번 산티아고순례길 일정이 새겨진 티셔츠를 내놓았다.
영어는 초급 수준에 헝가리어는 하나도 모르는 내가 이렇게 한 달 동안 그와 보낸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아무튼 이번 까미노는 내 인생에 있어 굵은 획을 긋는 놀라운 일이 될 것이며. 그게 오늘부터 이미 시작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