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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Jan 03. 2024

너 나가!

두 번째 산티아고 11일 차(Burgos-Hornillos)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일 듯 싶었다.

오픈한 숙소 때문에 걷는 거리도 20km 남짓,

해가 나지 않아 을씨년스럽지만 땀나지 않게 걷기 좋은 날이다.

한 가지 예상치 못한 것이라면 숙소가 있는 오르니요스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서 1시간 일찍 도착해도 할 게 없었다는 거 정도.

그런데 아주 뜻밖의 상황이 체크인 과정에서 발생했다.

1시 45분쯤 차를 타고 온 여주인은 기다리고 있는 우리를 보고는 인상 좋게 창문을 열어 인사를 건넸다. 오기 전에 다들 숙소에 대한 리뷰가 안 좋다며 "다른 곳이 열기만 했어도 절대 가지 않을 거"라고 말하게 괜한 기우일 거라 생각했다.

원래는 25유로 위에 'Breakfast'라고 쓰여 있었으나 그건 요리를 해주는 게 아니라며 그녀가 나중에 지웠음.

체크인을 하는데 숙박비, 저녁과 아침 식사를 모두 포함해 25유로를 내야 한다고 그녀가 말했다.

가장 먼저 체크인하헝가리 친구가 "우리는 내일 아침에 일찍 나가야 해서 아침은 필요 없다"라고 하자, 그녀는 "그건 선택이 아니라"며 아주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25유로를 지불했고, 다음은 내 차례였다. 운영의 부당함에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20km를 더 가서 잘 수는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여권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의자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포르투갈 아저씨가 나섰다.

(두 분의 말을 못 알아듣는 나의 짐작이라 정확한 내용은 아님.)


"밥을 여기서 안 먹을 수도 있는데 왜 무조건 돈을 내라고 하냐?"

"우리가 겨울에 숙소를 운영하려면 어쩔 수 없다."

"나는 먹을 거를 사가지고 와서 그것을 먹으려고 한다."

"안 된다. 저녁을 먹든 안 먹든 여기 머무를 거면 무조건 25유로를 내라."

"그런 방침이 어딨냐?"

"이 방침에 안 따를 거면 다른 데로 가라."

"알았다. 나는 가겠다."


두 분의 대화가 꽤 길었지만 대략적인 맥락은 위와 같을 것이다. 포르투갈 아저씨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대고 "Good Bye"를 외치더니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쿨하게 떠났다. 그 아저씨가 떠나고도 한참 동안 그녀는 화를 식히느라 내 여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몇 분이 흐른 뒤 바짝 쫄아 있는 내게 미안하다고 하며 체크인을 해줬는데 나는 연신 괜찮다고를 반복하며 그녀의 심기를 살펴야 했다.

침대에 짐을 풀고 지명을 검색해 보니 'hornillo'가 '풍로'라고 다. 화덕에 불이 잘 붙게 하기 위해 어릴 적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풍로를 돌리던 기억이 난다.

오늘 포르투갈 아저씨는 그녀의 욱하는 성질에 풍로질 하고 떠났고, 덕분에(?) 활활 타오른 그녀의 울화를 남겨진 우리가 모두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혹시라도 실수해서 "너 나가!"하지는 않을까 그 뒤로도 우리는 조심조심 그녀의 눈치를 살폈고, 더 이상 쫓겨나는 사람 없이 무사히 날이 밝기를 이심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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