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의 대표적인 순례길은 프랑스길이다. 총길이 800km(실질적인 거리는 그보다 적다고 한다) 프랑스길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인 생장피데포드에서 시작해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다. 공식적인 일정표대로 걸으면 30일이 넘게 걸린다. 하지만 대부분은 큰 도시에서 며칠씩 머물며 관광하거나 걷다가 생긴 병으로 몸을 회복하는데 며칠을 보내기도 해서 40일 넘게 걷는 사람이 꽤 많다.
5년 전엔 그런 상황을 잘 모르고 한 달 후에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예약했었다. 물론 당시에 외국에 오래 나가있을 사정은 아니어서 그 기간보다 더 여유롭게 일정을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26일 만에 산티아고까지 도착하게 일정을 짜야했다. 출발하고 나서 일주일 정도 유럽 친구들과 걷다 헤어진 것도 그들과 같이 걸어서는 도저히 귀국 전에 산티아고까지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급한 마음이 걸음에도 나타나 다른 사람보다 대체로 빨리 걷는 편이다. 특히 오르막을 오를 때 앞서 가던 사람을 하나씩 제쳐가며 오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다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다 탈이 나고 말았다. 걷는 동안 종종 만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은근히 경쟁하던 외국 청년이 있었는데 1km 남짓 오르막길에 그를 만나 보란 듯이 한 번도 안 쉬고 올라 챘다. 조금 있다가 올라온 그가 나를 향해 양손엄지를 치켜세우며 '쌍따봉'을 날려주었다. 그런데 그날 처음으로 발목이 아파서 숙소까지 가는 동안 무척 힘들었다. 쓸데없이 발동한 승부욕에 하마터면 나머지 일정마저 망칠 뻔했었다.
어제, 오늘 이틀 동안 같은 숙소에 머무는 H를 보면 5년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거 같다.
"저는 다른 사람들 오르막 오를 때 담배 한 대 피우며 쉬어요. 그러다 뒤늦게 출발해 한 명 한 명 제끼면서 앞으로 치고 나가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이런 승부욕이 있어야 이 긴 길을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는 두 개의 가방을 앞뒤로 메고도 무척 잘 걷는 편이다. 이곳 오기 전에 파리관광 중 발목을 겹질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잘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같이 출발한 그가 우리보다 2시간 정도 후에 도착했다. 힘들어 중간에 길게 쉬었다고 한다.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는 H처럼 걷지 않으려 노력한다. 기질적으로 급한 성격 탓에 걸음이 빠른 편이지만 누군가를 앞서기 위해 몸을 상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