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미노 Jan 07. 2024

나는 너의 앞모습, 너는 나의 뒷모습

두 번째 산티아고 15일 차(Sahagún-Reliegos)

그와 5년 만의 재회라 만나는 첫날은 반가움에 잠시 잊고 있었다. 우리가 그전에도 대화를 많이 나눈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일단 내 영어실력으로는 그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게 많았고, 가끔 알아들은 말이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답을 못해서 대화는 뚝뚝 끊어지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첫날 묵었던 로그로뇨의 알베르게 주인아저씨는 하필 특별히(?) 신경 써 준다며 싱글침대만 2개 있는 방을 내주었다. 그날 선물도 교환하고 저녁도 함께 먹었지만 방에 둘이 있으면 어찌나 어색하던지. 차라리 빨리 날이 밝아 순례길 위에 서고 싶었다.

그렇게 10여 일을 같이 지내면서 주고받은 말들의 반복성과 관계의 편안함, 표정을 통해 마음을 읽으며 이제는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가 되었다.(그렇다고 내 영어실력이 급작스럽게 는 거는 아님)

그는 훨씬 잘 걸을 수 있는데 늘 나 먼저 가라고 한다. 자신이 앞서면 아마도 내가 헉헉거리며 잰걸음으로 뒤따라올 게 뻔해서 그런 듯싶다. 그러다 보니 앞서가는 나는 풍경사진을 주로 찍다가 가끔씩 그가 걸어오는 그이 앞모습을 찍는다.

하루 일정이 끝나고 각자 찍은 사진 중에 상대의 모습이 있으면 왓츠앱을 통해 보내주는데 그는 거의 대부분 내 뒷모습을 담았다.


물론 둘이 밥 먹다가, 까미노를 걷다가, 시내구경을 하다가 셀피를 찍기도 하지만 혼자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훨씬 많다.


오늘 도착한 마을은 숙소와 슈퍼만 있고 식당은 없어 그가 직접 파스타를 해줬다. 난 면보나는 밥을 선호해서 평소 파스타는 즐기지 않는데 그의 요리솜씨가 제법이다. 엊그제 까리온에서 '요리는 자신 없다'며 냉동피자를 사 먹었던 건 순전히 거짓이었다.

그래서 내일 대도시 레온(León)에 가서 여건만 되면 5년 전 유럽친구들에게 만들어줬던 김치찌개로 보답을 해볼 생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번만 이기적으로 살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