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을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만나게 됐다. 아직은 아주 높은 고산지대가 아니어서 그런지 많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하얀 융단처럼 길 위를 덮은 눈을 밟으니 폭신폭신한 카펫을 밟는 것처럼 느낌이 무척 좋았다.
이른 아침 출발이라 동물의 발자국을 제외하고 사람이 지나간 흔적은 없었다. 문득 내디뎌 생기는 발자국이 뒷사람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조심 발을 옮기게 된다.
눈 내린 들판길을 걸어갈 때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이 발자국이 훗날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서산대사
최근 겨울 산티아고순례자들이 모여 있는 오픈채팅방에 이틀 동안 논란이 된 주제가 있었다.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숙박비는 얼마가 적정한가?'
유명 방송인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와 올린 유튜브 영상에서 '기부제 알베르게를 공짜'라고 했다는 내용도 올라와 뭇매를 맞았다. 그방송인의 공짜 발언이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다들 공분했으나 얼마가 적절한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다.
'작년 여름에 숙박 및 저녁 식사에 3유로를 기부한 분 때문에 해당 호스피탈레로가 "한동안 한국인 예약을 받지 않겠다"라고 한 적도 있다'는 글도 올라왔다.
지난번 그라뇽(Grañón)의 숙소가 기부제 알베르게였다. 원래는 다른 숙소를 예정하고 있었는데 예약이 갑자기 어그러지면서 급히 찾은 곳이었다. 숙박비도 저녁식사도 모두 기부제였기에 다음날 아침에 체크아웃하며 도네이션통에 각자 돈을 넣고 나오면 되었다.
그런데 숙소는 청소를 언제 했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청결해 보이지 않았고, 난방도 안쪽방에만 작은 라디에이터가 있어 바깥방에 있는 내게는 온기가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더욱 난감했던 것은 독일인 호스피텔로가 해준 저녁 식사였다. 그녀가 만든 파스타를 국자 같은 것으로 떠서 개인접시로 옮기려는데 긴 머리카락이 함께 따라 올라오는 게 아닌가. 그녀는 웃으며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아 식탁에 내려놓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갔다.
아직 첫술도 뜨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것을 보니 식욕이 뚝 떨어져 더 먹기 어려웠으나 그녀의 성의와 다음날 걷기 위해서 겨우 한 그릇을 비웠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내야 적절했을까? 나는 공립알베르게의 숙박비와 단품메뉴의 가격을 고려해 15€를 넣고 나왔다.과연 내가 낸 돈은 적절했을까? '기부'라는 것을 적절성으로 논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거라 생각한다.
지금 산티이고순례길 중 내가 걷고 있는 프랑스루트의 순례자 절반은 한국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외국인이 "왜 이렇게 한국인이 많이 이 길을 걷느냐? 혹시 한국에는 이곳을 반드시 걸어야 하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이냐?"라고 물을 정도다.
걷는 동안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조심한다고 하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을 욕보이는 말이나 행동을 한 것은 없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