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바날 숙소에서 폰세바돈(Foncebadón)까지 5.6km. 거기 바르에서 커피를 마시면 딱 좋겠다는 마음으로 7시에 헤드랜턴을 켜고 길을 나섰다. 망각의 동물답게 그 길이 모두 산을 오르는 오르막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다가 '이렇게 퍼지는구나' 낙오의 가능성까지 치밀어 올라올 때 폰세바돈 마을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저 불 들어온 곳 중에 분명 바르가 있을 거야.'
하지만 마을 입구 바르는 동절기에 문을 닫는지 장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바르 입구에 배낭을 내려놓고 물 마시며 한숨 돌리고 11km 떨어진 엘 아세보(El Acebo)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10미터쯤 가자 불이 켜진 집이 보였고 자연스럽게 눈이 그 집을 향했다. 인기척에 마침 밖을 내다보던 주인할머니와 눈이 마주쳤고 곧바로 그를 바라봤다.
"Try?"
그의 말 속엔 '혹시 커피를 마실 수 있는지 물어볼래?'가 담겨 있음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안에서 문이 열리며 창문 너머로 봤던 주인 할머니가 나오셨다.
"혹시 커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그럼 그럼 그럼. 들어와"
따뜻한 카페콘레체를 마시며 우리는 'Lucky'한 사람들이라며 웃었다. 그런데오늘 하루를 되짚어보니 이건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커피를 마시는 사이에 날이 밝아 랜턴 없이 길을 나설 수 있었다. 감사의 인사를 거듭 남기며 눈 덮인 길을 걷는데 좀 전 알베르게에서 인사했던 중국 순례자가 앞서 가고 있었다. 그는 걸음이 빠르지 않아 곧 우리 뒤로 처져서 걷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 산길을 걷는데 '이렇게 눈길을 걷기 위해서라도 winter camino를 또 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진으로는 그 아름다움을 다 담을 수 없는 절경이 펼쳐졌다.
그런데 밤새 내린 눈으로 앞서간 순례자들의 발자국이 사라져 몇 번이나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 무엇보다 발목까지만 오는 그의 트레킹화는 눈밭을 오래 걸으면 눈이 신발 안으로 다 들어가 동상이 걸릴 수도 있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순례길을 포기하고 도로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도로도 차가 거의 다니지 않아 순례길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쳐다보니 제설차가 내쪽을 향해 오고 있으니 피하라고 그 중국인이 알려준 것이다. 설경에 넋 놓고 걷느라 차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그가 아니었으면 제설차에 큰일을 당할 수도 있을 뻔했다.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다시 걷는데 알베르게 할머니의 따뜻한 커피, 아름다운 설경, 위험한 상황에서 그의 외침 등 뭔가 행운을 넘는 기운이 느껴졌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인 '철의 십자가'에 '아프거나 다치지 않고 순례길 마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 걸 들어준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침내 11km를 걸어 엘 아세보에 도착했으나 기대했던 바르는 이번에도 굳게 닫혀 있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비를 피해 어느 집 처마밑 의자에 앉아 각자 어젯밤에 만든 점심을 꺼내먹었다. 난 작은 바게트에 베이컨 뜸뿍과 계란프라이 2개를 얹은 샌드위치를 만들었는데 절반 정도 먹으니 더는 안 들어가 다시 봉투에 담아 배낭에 넣었다.
다음 마을에 가서 커피는 마시기로 하고 엘 아세보를 빠져나오는데 그때 그분(?)을 만났다. 그분은 스페인 시골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내게는 아주 아주 특별한 존재로 느껴졌다. 신자가 아닌 내게 마치 그분이 현신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처음엔 그냥 우리 앞에 서성이는 개였다. 그런데 계속되는 내리막길을 앞장서서 걷더니 1km를 넘겼는데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We have a dog."이라며 웃었다.
그런데 중간중간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다른 곳으로 충분히 갈만 한데도 꼭 순례길 표시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면서 우리 쪽을 한 번 쳐다보며 '잘 따라오고 있지?'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그때도 그는 'My dog'이라며 웃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왠지 그분이 우리를 안전한 곳까지 안내해 주기 위해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미 흠뻑 젖어버렸다.
그분의 안내에 따라 험한 자갈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는데 점점 걱정이 밀려왔다.
'이렇게 계속 내려갔다가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시려나?'
그렇게 앞장서서 길잡이를 해준 거리가 이미 5km를 넘기고 있었다. 다음 마을이 나오면 우리는 바르에 들릴 것이고 거기까지 함께 한다면 아까 먹고 남긴 빵 속의 베이컨과 계란프라이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쯤 그분이 멈춰 서더니 나를 바라봤다. 순간 5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첫 번째 산티아고 떠나기 몇 개월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첫 번째 산티아고를 물집 하나 안 생기고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저 높은 곳에서 지켜봐 주신 덕분이라고 늘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두 번째 까미노까지 돌봐주시러 오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 다음 마을(약 8km)까지 그분은 우리 앞에 있었다. 이제 어떻게 헤어져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차 한 대가 지나갔다. 그때 도로 가에 있던 그분이 갑자기 차로 달려드는 게 아닌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뻔한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달리던 그 차가 잠시 후 멈추더니 그분을 향해 소리를 쳤다.
한동안 나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분과 그 사람들을 지켜봤다. 곧바로 차에 태워 가지 않는 것으로 봐서 가족은 아니고 동네 사람인데 먼 곳까지 와 있으니 가족에게 연락해 모셔가라고 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급작스럽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진작에 먹을 거를 드리는 거였는데 아쉬움이 가득 남았지만 그래도 그 먼 거리를 고생고생 올라가지 않아도 되니 천만다행이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