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Sorry"와 "Muchas gracias(대단히 감사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그. 항상 나에게 선택권을 양보하고 조그마한 일에도 매우 감사해하는 그는 무엇때문에 화가 났을까.
점심 먹으러 들린 식당에서 피자를 자르는 그의 칼질에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다.
오늘 우리는 무척 여유로운 하루였다. 며칠 동안 40km 언저리를걷다가 모처럼 24km 정도만 걸어도 되니 아침도 여유 있게 먹고,중간중간 들리는 마을에서 커피도 마셔가며 가뿐하게 오늘의 숙소가 있는 빌라푸랑카(Villafranca)에 도착했다.
이곳은 TV프로그램 '스페인하숙'의 촬영지이기도 해서 걷는 동안 이것을 소재로 오늘의 글을 써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발생했다.
여느 숙소처럼 체크인 과정을 거치고 연세 많은 할아버지 호스피탈레로의 안내로 침실로 들어섰다.호스피탈레로는 못 알아듣는 스페인어로 이것저것 안내를 해주시고 떠났는데 그때부터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전 마을부터 그는 배가 많이 고프다고 했기에 난 몹시 배고픔이 안색에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짐 풀지 말고 먼저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얼른 밖으로 나왔다.그는 식당을 찾아가는 내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메뉴 델 디아(스페인 식당의 오늘의 메뉴로 고기를 포함한 코스 요리)를 파는 식당을 검색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름 큰 마을이라 생각했던 이곳에 식사를 할만한 레스토랑이 한 곳도 열지 않았다. 아마도 이 점이 그의 화를 더욱 북돋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우리는 숙소 근처로 다시 돌아와 그는 피자, 나는 파스타를 시켜 먹었다.
그전에그가 내게 물었다.
"우리 숙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어때?"
"왜?"
"속았어. 이건 재앙(Disaster)이야. 사진 하고는 전혀 달라. 그래서 나는 몹시 화가 나."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다. 그가 숙소의 상태를 보고 몹시 실망해서 화가 났다는 것을. 20일 동안 20개의 숙소를 거치며 숙소 컨디션(상태)은 정말 제각각이었다. 저렴하면서도 난방과 제반시설이 훌륭한 곳이 있는 반면, 자다가 베드버그에 물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잠을 설쳤던 곳도 여럿 있었다. 오늘 숙소는 그중 최악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호스피텔로에게 10유로씩을 지불했고 그건 리셉션에 있던 돈통 속에 들어가 버려 다시 돌려받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이미 10유로씩 냈는데?"
그는 그 사이 마을의 호스텔을 찾아 예약을 해버렸다.
"자신처럼 나이많은 사람은 그런 곳에서 잘 수 없다"라며.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으나 어제 긴 내리막길을 걷고 나서 부쩍 예전에 운동하다가 다친 왼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래서 폰페라다의 숙소에 누가 놓고 간 나무지팡이를 들고 길을 나설 정도였다.
결국 우리는 짐을 다시 챙겨서 마을 끝에 있는 호스텔로 숙소를 옮겼다. 비용은 그가 전부 지불했다. 내가 절반을 내겠다고 했으나 그는 회사에서 휴가비로 내주는 것이라며 절대로 받지 않았다.
천양지차의 숙소에 짐을 풀고 화가 좀 가라앉은 그와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슈퍼마켓을 찾아 가는데 그의 표정이 한결 부드럽다. 좀전까지 눈에 안 들어오던 동네도 왠지 더 아름답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