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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Jan 16. 2024

보내지 않을 편지, '큰아들에게'

두 번째 산티아고 24일 차(Portomarin-Palas de Rei)

이십일 넘게 걷는 동안 카톡 한 번 보내지 않는 큰아들, 전화도 내가 먼저 걸어서 오늘까지 딱 두 번 목소리를 들었다. 그 아들이 낼 친구들 일곱 명과 함께 오사카로 3박 4일 여행을 떠난다. 그것도 본인이 인솔(?)해서.

고3 때까지 줄곧 자기 방에서 컴퓨터 게임과 일본 애니메이션 시청으로 시간만 보내는 줄 알았더니 나름 수시 준비를 했는지 '일본어과'에 합격했다. 합격 통보를 받고 나서 동생한테 무용담처럼 "고등학교 입학 후에 일본어 관련활동을 엄청 체계적으로 준비했다"며 일장 연설을 하는 걸 보니 나름 앞가림은 하고 있어서 놀랐다.

일본 애니를 보며 거의 독학으로 배운 일본어 실력을 이번에 친구들 앞에서 제대로 써먹을 기회가 찾아왔다. 졸업 전부터 친구들과 일본을 가겠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아무 말이 없길래 흐지부지 되나 싶었는데 갑자기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진행되어 결국 8명이 함께 가게 됐다.

그 준비과정에서 비행기표, 숙소, 콜밴 예약 등 보이지 않는 엄마의 노고가 있었지만 디테일하게 일정을 짜고 친구들과 소통하며 준비해 나가는 모습을 아내로부터 전해 들으니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그동안 여행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점을 정리하여 일본 가기 전에 편지로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친구들과 가는 여행에 아빠가 미주알고주알 참견하는 거 같기도 하고, 본인이 직접 부딪혀보며 배우는 것도 필요해서 그만두었다.

1. 여행 중 반드시 챙겨야 할 거 중요도는 여권, 휴대폰, 신용카드, 현금 순이다. 이 네 가지는 항상 몸에 지니도록 하고 자리를 옮길 때는 반드시 잘 있는지 꼭 확인해라.

2. 여행 계획은 구체적으로 세워야 쓸데없이 낭비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다만, 타이트한 일정을 지키느라 친구 관계가 깨지는 일은 없도록 해라. 아무리 좋은 곳, 유명한 곳에 가더라도 이미 기분이 상해 있으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3. 이번 여행에서 너는 단순히 동행하는 친구가 아니라 인솔자, 보호자, 현지가이드의 역할까지 1인 4역을 해야 한다. 그러니 남들보다 항상 먼저 준비하고 어떤 점을 필요로 하는지 꼭 살펴보아야 한다. 너만 바라보고 있는 일곱 명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라.

4. 호텔이든 식당이든 떠날 때는 뒤를 꼭 확인해라. 물건을 흘리고 가는 게 있는지 살피기 위함도 있지만 떠난 뒷자리가 너의 인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청소는 아니어도 욕은 먹지 않도록 정리하고 떠나라.

이 외에도 옆에 있다면 앉혀 놓고 해주고 싶은 말이 많으나 전화로도 하지 않았다. 아무쪼록 아무런 사고 없이 건강하게 잘 다녀오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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