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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Jan 18. 2024

왼쪽 어깨부터 내주고 말았다

두 번째 산티아고 26일 차(Arzúa-O Pedrouzo)

벌써 나흘째,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다.

첫날은 추울 거라 생각하고 잔뜩 껴입고 나갔더니 비가 갑자기 쏟아진다. 급히 비옷을 꺼내 입고 걸었다. 금세 부터 땀으로 젖기 시작한다.

다음날도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어제의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고 가볍게 입었더니 비는 안 오고 바람이 세게 분다. 추워서 배낭에 옷을 꺼내 입었다.

다음날은 얇게 입고 처음부터 비옷을 둘러 입고 길을 나섰다. 비가 오락가락, 몸도 땀이 났다 말다 체온도 오락가락.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아 약간 따뜻하게 입고 나갔더니 곧바로 비가 오기 시작한다. 비옷을 오래 입으면 금방 더워져 조금 뜸한 틈을 봐서 벗어버렸다. 그러자 다시 비가 내린다. 장마 때처럼 많이 내리는 비가 아니라 아웃도어 재킷이 어느 정도는 막아줘서 그냥 걸었다.

그런데 그는 훌리스 소재 외투라 비에 약해 비옷을 입었다 벗었다를 연신 반복해 안타까웠다. 나름 비를 상대하는 노하우가 생겼다고 좋아했는데 비가 조금씩 거세지더니 제법 굵게 내린다. 이미 왼쪽 어깨는 젖어서 안에 입은 옷소매까지 물기가 느껴진다.

그가 묻는다.

"너 비옷 필요하지 않아?"

"아직 괜찮아."

그때는 정말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사흘 동안 오전 내내 내리던 비는 점심 때를 기점으로 점점 소강 상태에 접어들다가 오후에는 갰으니까. 시간은 12시를 향해 가고 있으니 이 비도 곧 그칠 거야.

그러다 왼쪽 어깨뿐만 아니라 거의 온몸을 내준 뒤에야 우리는 겨우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갔다.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았지만 '메뉴델디아'를 시켜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면 비가 그칠 거라는 기대를 안고.

점심을 다 먹고 커피까지 마셨는데 레스토랑 창문 너머로 바람에 휘어지는 나뭇가지가 보인다. 비가 그새 거센 바람까지 데려와 '너 고생 한 번 제대로 해봐라' 한다. 이미 버린 몸이지만 배낭의 어깨끈을 보호하기 위해, 추위에 감기 걸리지 않기 위해 축축해진 겉옷 위에 비옷을 다시 입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 바꾼 유심이 인식이 안 되고 숙소의 Wi-Fi 연결이 안 되어 숙소 근처 카페에 와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카페 통창을 통해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여유롭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여전히 광풍을 동반한 비가 내리는데 말이다.

비는 안에서 볼 때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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