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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2일차:서두르다가 망한다

론세스바에스 ~ 라라소냐 : 27.1km

by 까미노

커피도, 나이도 아니었다. 3일차에야 새벽 2~3시 경에 잠이 깨는 이유를 알게 됐다. 어제는 일부러 오후에 커피를 안 마셨는데도 어김없이 새벽 3시 조금 넘어서 깼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되었던 것이다.


어제보다 30분 일찍 길을 나섰다. 스페인의 6시는 아직도 캄캄하다.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 가다가 바르BAR가 보여서 커피와 빵을 사서 먹었다. 이 시간이 정말 행복하다. 오늘 하루 고행길에 나서는 나를 위한 작은 선물이랄까.


걷다가 어제 내 위 침대를 썼던 이탈리아 친구 프란체스코를 만났다. 그는 키도 나보다 훨씬 크고 몸도 말라서 그런지 늦게 출발했는데도 나를 앞질러 갔다. 게다가 중간 중간 멋진 풍경을 보면 DSLR로 사진을 찍어가면서 가는 데도 정말 잘 걷는다.


오늘 론세스바에스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대부분 수비리Zubiri(‘주비리’라고도 함. 그런데 출국 전에 이 지명이 자꾸만 ‘수리비’로 읽혔는지 모르겠다)에서 숙박하는데 남들보다 일정이 빠듯한 난 다음 마을인 라라소냐Larrasoña까지 가야 해서 부지런히 걸었다.


20180904_080130.jpg 길가에 심은 것인지 자생적으로 난 것인지 모르겠으나 복분자를 쉽게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귀한 열매가 흐드러지게 열려 있어 신기하기도 하고 검붉게 익은 것이 맛있어 보였다.

걷다가 길가에 잘 익은 복분자를 만나 몇 개 따 먹다가 지나가는 순례자에게 손을 내밀었더니 하나 집어 먹는다. 갈수록 잘 익은 복분자가 길가에 널려 있는데 피곤해서 나중에는 눈도 안 갔다. 그러다 수비리를 지나 오늘 숙박지인 라라소냐에 거의 다 와서는 곧 쓰러질 거 같아 몇 알 따먹었더니 이상하게 힘이 솟았다.


저렴한 공립 알베르게에 찾아오니 내가 첫 번째다. 이곳은 선착순으로 순례자를 받아서 늦게 오면 비싼 사설 알베르게나 호스텔 같은 곳을 알아봐야 하는데 다행히 오픈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내 자리는 확보했다. 안도의 숨을 쉬며 배낭을 내려놓는데 뒤에서 휘파람 소리가 난다. 이탈리아 친구 프란체스코다. 그도 수비리에서 안 자고 이곳으로 바로 왔다고 한다. 우리는 너무 반가워 자연스럽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리고 침대 배정을 받았는데 어제와 반대로 그가 1층, 내가 2층이다.


짐을 풀다가 내 나이를 공개했더니 자신도 같은 나이라며 민증(여권)을 깐다. 나도 여권을 보여주며 서로 한참을 웃었다. 외국에서 만난 첫 번째 동갑나기 친구다. 그가 저녁은 파스타를 해준다고 해서 나도 한국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기내식으로 나온 고추장 작은 거를 넣어 빠에야(스페인식 볶음밥)를 해주려고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지금 프란체스코의 휘파람 소리가 주방 쪽에서 들려온다. 이탈리안이 만드는 제대로 된 파스타, 그 맛이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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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세스바에스에서 수비리까지 가는데 산을 넘게 된다. 그런데 그 산길이 순례자들 사이에서는 악명이 높다. 높아서가 아니라 길에 뾰족뾰족한 돌들이 발바닥을 뚫고 올라올 듯 날카로울 뿐만 아니라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을 내려오는 방법은 서두르면 안 된다. 그렇다고 무조건 천천히 걷는다고 넘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리를 약간 기마자세처럼 벌리고 어그적어그적 걸어내려와야 무사히 산길을 내려올 수 있다. 그런데 순례자들 대부분이 그렇게 걷지 않는다.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한 순례자들 대부분은 2일차에 이 길을 걷기에 아직도 팔팔한 상태라 길이 험해도 조심스럽게 걷지 않는다.


그러다 넘어지면 옷이 찢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무릎이 까지거나 발이나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고 병원으로 실려가기도 한다. 어떤 이는 이 곳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했는지 묘비가 세워져 있기도 했다.

인생도 마찬가지. 서두르다가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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