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교사 ○○○(글쓴이의 요청으로 익명으로 게재합니다)
혁신학교가 등장한 지 10년째다.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래서 때로는 식상하게까지 느껴지는 단어이기도 하다. 기존의 묵은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혁신’이라는 단어가 식상함으로 다가올 즈음에야 나는 ‘혁신학교의 본질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시작했으니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작 혁신학교에 있을 때는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다. 누리고 있는 것의 귀함을 당연함으로 생각한 까닭이었다.
2월 새로운 학교로 발령을 받고 교감선생님을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우리학교는 혁신공감학교입니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의 낮은 웅성거림이 잠시 이어졌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일반학교와 똑같아요.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궁금했다. 교감선생님의 ‘하시던 대로’의 의미가 말이다.
오래지 않아 나는 그 ‘하시던 대로’의 의미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학교생활의 많은 부분이 숫자화 혹은 점수화 되고 있었다. 교문 지도, 아침자습 감독, 동아리, 아침 교통지도(아침 교통지도를 해 본 적이 없던 나는 교통지도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등 모든 활동이 성과급 또는 학폭 점수에 반영이 되었다. 위원회에 선생님들이 많아 의자가 부족했다는 옆자리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학교는 위원수가 많은가 봐요?”라고 했더니 위원회 참석 여부가 성과급이나 학폭 점수에 가산이 되는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런 점수화가 아이들에게 집중해야 할 선생님들의 에너지를 분산・소진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규정들이 공론화 장에서 토론되기 보다는 암암리에 정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정신없이 바쁜 학기 초 이런 규정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메시지로 이루어졌다. 보통 이런 메시지 마지막에는 ‘의견 없으시면 기존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로 끝났다. 학기 초 수많은 메시지 폭탄 속에서 이런 메시지를 꼼꼼히 살피고 기존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기는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게 많은 규정들이 ‘하시던 대로’ 정해지고 있었다.
‘혁신학교의 본질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떠오르는 것은 이 ‘하시던 대로’의 관행이 관리자와 교사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사와 아이들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느끼면서부터였다. 올해 처음으로 학생회가 ‘자율복 데이(한 달에 하루 자율복 입는 날)’를 건의했다. 학생회 담당 선생님께서는 학교공동체의 의견을 수합하기 위해 토론회를 제안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토론회가 의미 있는 것은 상대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상대가 주장하는 그 배경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상대 주장의 배경적 맥락을 이해하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제3의 대안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다수결에 의해 나의 주장이 수용되지 않더라도 토론회를 거쳤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 구성원들의 만족도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결국 토론회는 열리지 않았다.
나는 사실 학생들이 무엇을 입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정말 아쉬웠던 것은 학생들이 자신이 무엇을 입을지에 대해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했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의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다. 민주적인 의사결정 경험의 축적은 다른 사안에 있어서도 자신들의 의견을 만들어갈 수 있는 힘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 키우고자 하는 민주시민능력은 교과서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이 정당한 절차에 의해,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통해 이뤄진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경험은 아이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교사들이 ‘하시던 대로’의 관행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하시던 대로’의 관행을 극복하지 못했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능가할 수 없다.’는 켄 베인의 말이 따끔하게 다가왔던 시간이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남에게 주기는 불가능하다. ‘하시던 대로’를 극복하지 못한 우리가 그 극복의 경험을 아이들에게 전해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 사람의 내면은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지와 상관없이 그 사람의 가치관, 마음 상태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다른 공동체에 비해 교사와 학생 간의 위계가 확실하고 반 폐쇄적 특징을 지니는 학교공동체에서 교사가 지닌 가치관과 삶의 방식은 수업, 생활교육, 언어와 표정 등의 수많은 기제들을 통해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아이들에게 스며든다. 가치 영역의 배움은 말이나 글이 아닌 교사 자신의 삶으로 가르쳐진다. 때문에 교사는 아이들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삶의 방식을, 학교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궁구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성찰 없이 교사로 산다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학교공동체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기존의 것을 고수하려는 보수 관성을 지니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저마다 지니고 있는 이 보수 관성은 그 자체로 다른 세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잠재적 폭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혁신은 새로운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시던 대로’에 익숙한, 자신의 관성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관성에 물음표를 던지고 권리를 학교의 주인인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순간 해묵은 관성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움은 저절로 아이들의 몫인 것이다.
다른 세대를 살아가는 아이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사들의 운명은, 바위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들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그것과 닮아 있다.
석 달 정도가 지났다. 나 역시 우리 학교의 ‘하시던 대로’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의 낯섦, 불편함이 점점 편안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교무실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같은 학년을 맡은 선생님들과의 수다가 즐겁고, 각자의 자리에서 애쓰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 선생님들의 노력에 감동하기도 하고, 마음이 짠해지기도 하고,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나는 우리 학교 공동체가 더디더라도 짠한 마음으로 공감하고 서로 토닥여주면서 ‘하시던 대로’의 관성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굴러 내려오는 바위를 ‘함께’ 들어 올릴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함께’는 늘 상상 이상의 것을 가능하게 함을 동료들을 통해 조금씩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