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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Oct 21. 2018

같은 장면을 봐야, 아이들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

-운산고등학교 교사 이지은

아주 정확하게 문장의 앞과 뒤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강 요약하자면,


“샘 반의 00이가 칭찬을 자기 것으로 가져가지 못해요. 칭찬해주는 순간, 제가요? 머쓱해하면서 맥락 없는 이야기들로 오히려 칭찬해 준 사람도 존중받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맞아, 00이 내 수업시간에도 그런 면이 많이 보여요. 00이가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주면 좋은데, 자신도 돕고 친구도 돕는 말을 할 기회를 주어도 그것을 제대로 가져가지 못해서 안타까워요.”     


00이는 예측이 불가능한 아이다. 하지만 목소리도 크고, 몰아붙이는 대화 방식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쉽사리 같은 톤으로 대응할 기회를 찾지 못하게 만든다. 또한 심한 감정기복이 모둠활동을 할 때, 긍정 또는 부정의 극단적인 소통의 형태로 드러난다. 교사도 아이들도 수업 안으로 끌어오기 위해 00이의 감정선에 예민할 수밖에 없으니 50분 동안 00이에게 할애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아지는 것이다. 서로 묻고 배우는 시간이 많은 운산의 수업환경에서 00이는 연구대상이자 극복과제이다.      


00이에 관한 우리 학년 선생님들 대부분이 같은 장면을 보고 있었다.      

00이의 담임인 나는 이 순간 결정적인 문장을 던져야 하고 이로 인해, 더 깊게 00이를 이해하고 성장을 도울 수 있는 방법들까지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외쳐보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맞아. 왜 그러는지 몰라.” 끝. 더 이상 깊은 대화로 이어지지 못한다. 아마도 그들은 나에게 00이의 앞뒤 없는 행동과 소통방식들에 대한 담임으로서의 고견(?)이 덧붙여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야 00이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다음 수업시간에 같은 장면에 대해 기대해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절호의 찬스 앞에서, 이 무슨 허무한 마무리인가.     

하루 종일 주눅이 들어있었다. 이게 주눅이 들 정도의 문제인가 대해 며칠을 생각했다.


첫째, 나 자신이 00이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만 충만했지, 그 느낌을 정확한 단어나 문장으로 인지하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00이에 대한 나의 이해도는 내 감정 처리만을 위하는 정도에서 머물렀던 것이다. 상담과정에서도 00이는 자신을 향한 담임의 걱정과 노여움의 감정만 가져갔을 것이다. 부끄럽고 미안했다.     


둘째, 교과시간에도 담임행세를 했다. 00이의 돌발행동을 사전에 차단할 생각으로만 가득 차, 00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온갖 비언어적인 표현으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00이를 향한 내 감정에만 매몰되어 있던 탓이다. 그러니 다른 교과 선생님들이 보는 그 명장면을 나는 매 수업시간 놓치고 말았다. 00이의 성장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같은 장면을 보아야 한다.


우선, 스스로 입을 열 수 밖에 없는 수업디자인이 필요하다. 50분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알 길이 없다. 또한 누구는 하고 누구는 하지 않으면, 그 장면을 지속적으로 보는 교사 혼자만 끙끙 앓게 된다. 다른 교사들과 쉽사리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에 관한 느낌 정도만 단순히 공유하는 차원에서 끝나게 된다.   


또한 같은 장면을 보았으면 방향성을 가지고 일관되게 이끌어 갈 우리끼리의 언어들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감정을 해석하는 언어 감도 어느 정도는 결이 같아야 한다. 같은 언어를 쓰다보면 한 방향을 바라보게 되듯이, 우선 나 스스로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의 결들을 명료하게 만들고 동료교사와 지속적으로 의미들을 다듬어가야 한다.     


“칭찬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를 보면서 칭찬해주는 교사가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다.” 라는 문장 안에는 그 상황 속에서 학생과 교사가 오고갔을 미묘한 감정선들에 대한 교사들의 합의된 해석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그 다음 교사가 말했듯이, 00이의 수업방해 표현들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기회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장면에서 한 방향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런 맥락이지 않을까 싶다.


김교사는 그 순간 불같이 화를 내고, 박교사는 그 순간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고, 강교사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물론 각자 교사가 그 상황을 견뎌내는 방식들이고 수많은 경험을 통해 터득한 관계를 해치지 않는 나름의 방식들일 것이다.     


“맞아. 왜 그러는지 몰라.”에 뒤를 이어, 그 아이의 배우고자 하는 의지 부족, 친구관계 문제, 아이에 대한 부모님의 관심 부재 등으로 피상적인 원인을 나열한 뒤, “에휴, 어떡해. 걱정이야.” 하면서 누군가 나의 괴로움을 공감해주면 그것으로 만족했었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혁신학교가 되니 중학교도 학년부 교무실이 생겨 아이들 이야기가 풍부해지고 생활교육에 도움이 된다고 외치고 다녔다. 그것은 나의 오만함이었던가?     


하지만 우리가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는 문제로 여겨지는 아이들 행동에 대처하는 방식을 나열하기보다는, 아이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복합적인 감정선들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00이가 다른 친구와 소통하는 수업장면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면서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갈 때, 00이를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도 길러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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