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는 것들.
면도기를 찾으려 더듬거리다 네 번째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몇 중날이던가, 꽤 예리한 녀석이어서 베인줄도 모르고 면도까지 마치고 나니 옆에서 말을 해준다. 너 피가 나. 면도를 하다 베였나, 아니 손가락에서 나는 피라는 걸 안 것은 그 때였다.
많이 불편했다. 날카로운 것에 베인 상처라는 건, 쓰라리고 집요하게 따가웠다. 더 큰 종류의 상처라면 아프다고 말이나 하겠는데 이까짓 작은 생채기야 엄살이나 될까. 하지만 아픈 걸. 유독 피도 잘 안 멎는다 이런 상처는. 하필 다친 곳이 왼쪽 약지라서 그런 건 아니다. 두 줄 정도 선명한 자국에서 피가 난다.
어떤 사랑의 끝이라는 건 아름답기만 하지 않아서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되고, 서운한 감정만 이야기를 하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만 이야기하는 걸. 때로 아쉬우니 여지를 남기고 싶기도 한. 그래, 찌질함을 써내려 가는 하나의 기록이 되는 것.
관계에 대한 생각을 하자면 아마 끝이 없겠지만, 누군가와 만나는 것이 일정부분 손해를 감수하고 만나는 것이라면 그 손해를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을 때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닌지. 얽히고 섥힌 것들이 많아서 일일이 떼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오래 붙여놓은 테이프처럼 흔적을 지우기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걸 떼어내겠다고 마음 먹었다.
오래된 커플이란 얼마나 안전한 관계일까. 메뉴를 정하는 것도 쉽고, 싫어하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편하게 익숙한 카페에 간다. 서로에 대해 발견할 것이 없을 때, 그렇게 오래된 사이가 된다. 그 안전함에서 벗어나 다시 정글을 헤메기 싫어 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사람과 내가 얼마나 다른지 이유를 찾고 싶거든 사소한 거라도 끼워 맞추면 가능하다. 버티고 버티던 부분에서 더 이상 무너질 곳, 물러날 곳이 없을 때가 오거든.
뭐라고 적든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자면 끝도 없는 것이 연애고, 한 쪽의 말만 들으면 안 되는 것도 연애. 그래서 침묵하는 편이 더 나은 것이 연애사. 그런 연애사가 지금도 어디선가 시작되고, 또 사라지겠지. 나 역시 또 어디선가 적잖은 손해를 감수하고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겠지.
나에게 책임을 물을까봐 걱정이 되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모른다. 집은 편안하지 않고, 낯선 남에게 오는 공포보다도 더 큰 것은 바로 근처에서 오는 가족의 얼굴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해 못한다. 그게 당연하다. 그게 내가 가진 트라우마니까.
지난 글에 누군가 그런 댓글을 남겼다. 상처를 이렇게 솔직하게 다 말하다니 대단하다고. 상처를 떠벌리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담담하고 시적이고 케케묵은 남의 이야기처럼 말을 한다고 해서 결코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다. 먼지를 털듯 툭툭 털면 얼마나 좋겠냐만, 잡동사니가 굴러다니는 여의도만한 크기의 창고를 정리해야하는 느낌.
가정폭력이나 왕따였던 기억을 드러내는 것이 약점이라고 한다면 약점을 못 잡아 안달난 시대에 난 이미 패배자다. 실컷 물어뜯어라. 먹을 것이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그래 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가보다. 말을 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이런 무덤덤함을 보고 위로를 느낀다면야 감사할 따름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면밀히 들여다보야 알 수 있을만큼 표정이나 기분을 잘 숨기진 못했다. 나 무슨 일 있어요 하며 광고하려 하는 마음은 아닌데, 위로가 천성인 자들은 걱정스레 물어온다. 괜찮니? 아니 괜찮지 않아요.
상처라는 건 기본적으로 '아무는 것'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통증과 흉터야 논외로 두고 상처라는 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아물고 만다. 결국 아물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상처 역시 아물게 되지 않을까. 면도날에 베인 네 번째 손가락은 어느새 아물었다. 그런 것이다.
그리고 아마 또 새로운 상처들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멍청하게 잠시 정신을 놓으면 금세 면도날에 다시 베일 수도 있고,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아물 것을 알기에 흉터 남는, 오늘 역시 흔적이 남는 일들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