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 맙시다,

태극기를 빼앗겼다.

by 박하



촛불 vs 태극기

광화문 광장, 경찰서 앞은 시끌시끌했다. 피켓을 들고 일인시위하는 학생을 경찰이 둘러싸고 압박했다. 앞이 가려진 학생이 불만을 표시하자 경찰은 위험하다며 그를 강제로 연행하려 했다. 주변 사람들은 너도나도 촬영을 시작했고 나 역시 카메라를 들었다. 경찰은 외쳤다. 찍지 마세요, 찍으시면 안 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촬영하면 안 된다고? 미쳤냐. 내가 귀국한 당일, 그러니까 사흘 전이었다.


사람들은 쉽게 화를 냈다. 이성이 동이나서 더 이상 참아낼 기운이 없는 느낌이다. 모두가 촛불로 물들던 처음과 달리, 시청엔 어느새 태극기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한 쪽에서는 싸움이 났고 뜨거운 감자가 나와 '좌절금지'를 불렀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아무래도 대결구도는 불편했다. 강제로 싸움을 붙이는 그 느낌을 뽑아내기에 언론은 불이 붙었다. 왜? 우리끼리 싸워야 하는 이유가 뭐길래. 의견이 다른 것은 이해할 수 없지만 존중한다. 그러나 우리의 적은 그 쪽이 아닌걸. 왜 우리는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할까.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었다. 우린 누구와 싸우는 겁니까.





태극기를 빼앗겼다.


대통령을 끌어내려야 한다며 말하는 남자는 거대한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그거 들면 안돼요. 왜 안돼요? 나도 대한민국 국민인데. 저 건너편에 노인들이 들고 있으니까. 태극기는 그쪽거라구요. 니꺼내꺼가 어디 있어요, 난 민주주의를 지키고 싶은데. 아니, 글쎄. 오해를 받을 수 있다니까요. 우린 태극기를 빼앗겼어요, 하다 못해 그럼 노란 리본이라도 길게 달아요. 계속되는 언쟁. 그리고 결국 몸싸움이 붙었다.


청춘, 열정이라는 단어와 함께 태극기를 빼앗겼다. 적어도 나는, 태극기를 보면 어떤 감정보다도 앞서 거부감이 물씬 든다. 이를테면 태극기가 주름진 손에 들려 -정복하자, 혹은 -끝장내자 따위의 후렴구가 붙은 노래와 함께 있는 것에 대해. 정복당할 것은 무엇이며, 또 끝장당할 것은 무어냐.




부탁합니다, 부디 지치지 말아 주세요.


발언대에 오른 사람은 그렇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야지, 발걸음을 돌릴 때였다. 지치지 맙시다. 말 한 마디에 왈칵 눈물이 차오르는 것은 그 말이 지닌 진심의 무게가 어떤지 알아서. 조금만 더 머물자고 마음을 고쳐먹은 뒤, 꼬박 백 번 쯤은 더 외쳤다. 물러나라. 물러나라.


아, 광화문. 어디 다녀왔냐는, 카페에서 일하는 친구의 말에 그렇게 말한다. 커피를 내리며 이젠 떨떠름하거나 시큰둥한 그 반응과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시린 광장 바닥에 엉덩이 부비며 앉아 있다 돌아온 친구에게 건네는 차가운 커피. 하지만 그 타는 속만큼은 안다는 듯 내미는 한 잔.




신창가는 기차 맞아요?


시청역 1호선 스크린도어 앞 8-2번에는 머리에 노란리본 머리핀을 꽂은 여고생 둘이 셀카를 남기고 있었고 8-1번에는 노인 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야당 대선후보가 국가예산 20조를 횡령했다는 근거없는 말을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금세 내용은 바뀐다. 광장에서 잃어버린 공손함을 스크린도어 앞에서 다시 주운 것처럼 그렇게. 저기, 학생 이거 신창가는 기차 맞아요?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스크린 도어가 열리고 그 8호칸 열차 안쪽은 지상과 다를 바 없이 뒤섞였다. 태극기를 말아 들고 있는 사람들과 노란리본들을 잔뜩 가방에 단 사람들까지. 젊은이들은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했고 노인들은 고맙다며 인사했다. 터널을 지나며, 서로가 매주 빚는 전쟁터를 지나며.


딱 한 정거장을 지나자, 지하철엔 적도 아군도 없는 국민만이 남아 있었다.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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