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의 추억>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작들을 돌려보는 일은 나름의 재미가 있어, 요리를 할 때나 스트레칭을 할 때. 무심코 켜 두는 맛이 있다. 적막한 공간에 정적을 즐기는 일 역시 익숙하지만 마음이 그럴 때가 있다고. 그러나 이 영화가 그렇다고 말할 순 없다. 며칠을 가만히 앉아 이도 저도 할 일이 없으니 정성스레 밥이나 해 먹을 때 이 영화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난 아직 못 봤어.
'살인'과 '추억'. 이 해괴망측한 조합은 무엇인가 의문을 가졌다. 지금 역시 수없이 회자되는 영화. 해석도 많고 의견도 분분한 영화에 한 숟갈 더 끼얹는 글을 쓴다. 이젠 모든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진 않았을까. 그러나 그건 나의 기우였다. 난 아직 못 봤다는 친구의 말에 망설임 없이 보기로 한다.
영화가 극장에 나올 때 나는 기껏 초등학생이어서, 이 멋진 포스터와 제목에 감탄을 하고는 지나쳐야만 했다. 스크린으로 보는 기회를 놓치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심야 영화 채널에서 하는 살인의 추억을 봤다. 아, 나는 왜 하필 어렸었는지.
그 시절 개그 프로그램에서 한동안 낄낄대며 봤었던 모든 것들이 바로 영화의 패러디였다. 오래된 드라마 수사반장의 주제곡이 나오며 취조실에 앉아 짜장면을 먹는 장면이나, 바보 같은 얼굴로 "향숙이 예뻤다.", "밥은 먹고 다니냐?"묻는 까까머리의 사내 흉내 따위가.
영화의 핵심을 이루는 사건은 화성 연쇄 살인사건이다. 나보다 어린 세대의 친구들에겐 드라마 '시그널'을 통해 알려진 유명한 미제사건. 1986년부터 1991년까지 10명의 여성이 살해되었으며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설명할 것도 딱히 없다. 사건의 시기상 수사는 비과학적이기도 하고 현장보존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결국 잡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그 때 사건을 맡았던 형사와 경찰의 탓으로 돌려 무능하다거나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 역시 결코 아니다. 때가 안 된 시대의 비극이다.
직감으로 수사하는 박두만(송강호) 형사는 그 시대를 대변하는 하나의 상이다. 거칠고 투박하며 앞뒤 논조에 맞지 않는 수사로 범인을 단정지어 버리지만 그가 결코 밉지 않다. 범인을 특정화하지조차 못 해 의심 가는 사람마다 조용구(김뢰하) 형사와 고문을 하고 범인 자리에 앉혀버린다. 정신장애가 있는 백광호(박노식)을 데려다 케케묵은 운동화를 논바닥에 찍어 증거를 만든다. 하지만 그는 징계조차 받지 않는다. 그런 시대였다.
한편 서류에 모든 것이 나와 있다며 논리적 수사를 하는, 서울에서 내려온 서태윤(김상경). 그는 범행 당일 전부 비가 왔다는 사실과, 동네에 실종신고가 되었던 여자의 시신을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결국 그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수사 역시 마지막에 그를 배신하지만. 뻔한 설명은 이쯤하고 내용을 보자. 모든 시퀀스가 섬세하고 가감없이 이루어져있어 그 사이에 품은 의도를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래 이 영화는 완벽해서 몇 번이고 돌려보아야 했다.
얼핏, 그 반대되는 성향의 둘을 콤비로 묶은 건 어떤 생각이었을까. 영화의 초장부터 현장보존 따위는 결코 되지 않고, 경찰차량마저 멀쩡하지 않은 고물이다. 논두렁의 시체를 보기 위해 고장난 차를 두고, 경운기를 얻어 타고 가는 짧은 인트로에서 감독은 모든 걸 보여줬다. '우린 이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고.
박두만의 아내는 병원을 관두고 소위 말하는 '야매'시술을 한다. 수입이 더욱 짭짤하다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형사의 아내가 저래도 되느냐는 물음이 든다면, 당신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와야한다. 1980년대로 가기 위하여. 그러나 결코 범죄를 방임한 것이 아니라는 최소한의 믿음과 함께.
처음 만난 서태윤에게 박두만은 엄청난 날라차기를 선사한다. 관객은 웃고 말 수 밖에. 말보다 행동이 빠른 것은 형사의 수사력과 어떤 관계가 될까. 사소한 언어 폭력조차 문제가 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과연 형사가 어떤 것을 믿고 행동할 수 있는가' 싶은 딜레마를 던진다. 과잉수사, 표적수사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요즘이니까. 응당 필요한 정도의 범위를 우린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 것인가. 생각이 들기 무섭게 박두만은 백광호를 범인으로 만든다. 금세 들통이 나고 말긴 해도.
영화 초반, 여성 살해 사건을 수사하는 것과 대비되게 여경을 무시하는 일괄적인 태도는 영화 말미에 갈 수록 완화된다. 처음엔 커피나 타오라고 시키지만, 미끼로서 수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결국엔 비오는 날의 라디오 사연이라는 결정적 단서까지 제공한다. 수사를 진행하는 남자형사들이 진전이 없자 종국에 모든 지푸라기를 잡는 치사함을 젠더로 표현할 감독이 한국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잊을 때 쯤 한 번씩 등장하는 시대에 대한 회상은 지친다. 시대에 모든 걸 떠넘기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봉준호 감독의 분노가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박두만은 범인의 실마리 하나 잡지 못하고, 살해 여성의 시신에 복숭아 조각까지 넣는 점점 대담해지는 범인의 행동에 분노하다 무당까지 찾아가게 된다. 놀라운 것은 이게 각색이 아니라 실화라는 점. 샤머니즘이야 얼마 전 벌어진 정치판에도 있었으니 새삼 놀랍지도 않지만, 얼마나 잡고 싶었으면.
그렇게 현장에 부적을 가지고 갔더니 누군가 찾아온다. 빨간 팬티를 입고 자위를 하던 그를 쫓아 잡을 때의 박두만의 예리함은 빛을 발한다. 관객의 기분을 대변하듯, 과학 수사를 말하던 서태윤을 흘겨보며 '수사란 이런거야.' 싶은 시선. 공사 인부의 물을 꿀꺽꿀꺽 들이키며 보는 이는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하다. 형사에게 단순히 무식함의 프레임을 씌우지 않겠다는 의지를 우리는 거기서 엿볼 수 있다.
상처나지 말라고 워커에 덧신까지 씌워 발길질 하는 조용구 형사가 말하는 학력은 고졸이다. 지금 시대를 덧씌울 필요는 없으나 형사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감독은 여전히 끈질기게 시대를 말한다. 파상풍에 걸려 다리를 잃게 되는 조용구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 기본적 지식이 부족했던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빨간 팬티를 잡고, 그러나 일개 좀도둑이었던 그에게 고문에 가까운 심문을 하는 중에도 일반인이 스쳐지나간다. 아무 대사도 없고 얼굴도 없는, 영화 촬영장에 난입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덤덤하게 자기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비공은 어이가 없기까지 하다. 전두환과 함께 나오는 끊임없는 강조에 초점을 두다보니 깨닫는다. 아, 이건 정말로 1980년대의 그 어느 날이구나.
밥은 먹고 다니냐?
이리저리 수사방향을 틀며 좌충우돌하길 여러 번, 형사들은 범인과 가장 부합한 박현규(박해일)을 발견한다. 알리바이를 입증하지 못하지만, 증거 역시 없는 그를 놓아주고 다시 벌어지는 사건. 유일하게 탈출해 살아남은 생존자는 증언한다. '손이 여자처럼 부드러웠다'고. 서태윤은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해 박현규를 찾아가 마구잡이로 패기 시작한다. 그 때 박두만이 미국에서 온 DNA검사 결과를 들고 온다. 결과는 불일치.
박두만은 박현규와 눈을 맞추고 끝까지 대립하며 말한다. '씨발, 봐도 모르겠네.' 얼굴을 보면 범인인지 알 수 있다는 처음의 말과 다르게, 그는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밥은 먹고 다니냐? 이 장면이 소름돋게 좋은 이유는 한 가지다. 감정이 앞서던 형사와 이성이 앞서던 형사의 스타일 역전으로 인한 합치. 그렇게 형사들은 스스로를 바꿀만큼 노력했다.
영화 속. 스크린 밖을 넘나드는 표현들을 보면 감독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 일종의 수사 보고서를 만든 느낌을 준다. 아주 독특하게도, 유가족의 기분은 없다. 그저 사건 현장에 유가족이 세웠으리라 짐작이 가는 저주 섞인 허수아비 하나 뿐. 그 곳에는 그렇게 적혔다.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
이런 촬영 기법을 통해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선택한 이유는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여 이를 해결하고 싶은 감독의 의지라 생각이 든다. 생존자가 느끼는 고통과 형사들의 치열함을 담기에도 부족해서. 그리고 범인을 궁지까지 몰 수 있도록. 여전히 숨을 쉬고 있을, 밥을 먹고 있을 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나열한 영상. 그리고 형사들에겐 충분하다고, 고생했다고 말하고 싶게 말이다.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고 무능한 경찰이라던가, 범인을 잡지 못한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보는 우리보다 더욱 답답했을 그들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니까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흐른 뒤 박두만은 녹즙기나 팔러 다니는 시시껄렁한 양반이 되지만, 길을 지나다 그 논두렁에 들러 시체가 있던 도랑 밑을 본다.
어떤 아저씨가 예전에 자신이 한 일이 생각나서 와 보았다고 전달하는 꼬맹이의 말 한 마디에 영화는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친절하게도, 그리고 공교롭다는 듯 다시 일깨워준다. 아직 여전히 그는 잡히지 않았다고. 봉준호 감독은 그렇게, 그의 추억을 우리 모두의 추억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