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재심>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당장의 기분으로 쓰고 싶은 영화는 오랜만이야. 그러나 참아야지.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보냈던 메시지의 내용이었다. 나는 왜 당장에 이 영화를 이야기하지 못해 안달한걸까. 그러나 꼬박 하루를 참기를 잘했다. 좀 더, 이야기 해야할 많은 것들과 가슴 언저리에 껄끄럽게 얹혔던 부분들이 선명해졌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하였습니다.
영화는 어디까지를 사실로 만들었는가. 어느 영화였는지 그것을 기점으로, 인트로에서 이런 문구가 뜨는 일이 흔해졌다. 이 문구는 개인적으로는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뇌는 믿고 싶은 것만을 믿어서 '실화'에 초점을 맞추지 '각색'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되려 사실을 각색된 허구와 섞어 뭉뚱그려버릴 수 있으니 관객은 최소한의 경계를 가져야 한다는 무언의 약속이 아닐까. 얼핏 뻔한 각색과 무게 있는 팩트의 조합. 이것이 이 영화의 정체성이다.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은 이미 많은 매체들로 회자되었고 찾아보면 간단 명료히 나오기에 추가적인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영화가 개봉 되기 바로 전까지 사건은 '진행 중'이었다는 것. 진범이 잡히고 누명을 쓴 주인공은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재심>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혹은 영화의 중반까지도 주인공은 '살인자'였거나 '피고인'신분에 불과했음이 분명하다.
감독의 신뢰는 스테이크만큼이나 두툼하다.
영화라는 매체의 제작과정을 떠올리면 '무죄'라는 답을 정해놓고 영화를 밀고 나가는 에너지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싶다. 크라우드 펀딩과 어찌보면 노골적인 협찬들이 자리 한 켠을 차지한다. 무료 법률상담을 처음으로 나가며 탔던, 유난스럽게 새 것 같은 민트색 경차가 퍼져버리고 느꼈다. '제발 주인공의 휴대폰은 최신식이 아니어야 해.'
'이 사람은 살인자가 아니다.'라는 가정은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이미 사전에 사건에 대한 조사를 했겠지만, 영화 자체의 에너지보다 감독의 따라오라는 손짓이 눈 앞에 보이니 조금 불쾌하다. 우리 사회가 이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사과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대사로도 불쾌함은 가시지 않는다. 관객으로써 진실을 판단할 참여재판적 성격의 영화를 상상하고 온 사람이라면 의견이 개입할 수 없는 부분에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세 영화가 번갈아가며 떠오른 이유는, <재심>이 이 영화들의 장면을 따왔기 때문이리라. 더블 캐스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슷한 색깔의 조합인 정우와 이동휘의 콜라보는 찰진 대화만으로도 보는 재미가 있다. 그와 더불어 변호사 법 1조를 읊는 장면은 <의뢰인>의 송강호가 오버랩 되었고, 짐을 챙겨 로펌을 떠나는 장면은 '강철중'이 검찰을 떠나는 장면과 너무도 닮았다.
아쉬운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살인자 누명을 쓴 현우가 악덕 형사를 죽이려 할 때, 살인미수가 될 뻔한 각색에 대하여 뒷수습이 전혀 없는 점. 준영이 현우를 말리며 부둥켜 안고 우는데 변신로봇이 변신하듯 건드리지 않는 룰. 이런 장치들은 이젠 너무 허술하다.
앞서 적은 어마어마한 혹평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다시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 아쉽다. 더 구체적이고 부드럽게 흘러가는 드라마였다면 반드시 성공했을 이 스토리는 여전히 아쉽다. 그래, 이것저것 섞은 짬뽕같은데 심지어 뭔가 부족한 듯한 이 영화가. 작은 그릇에 넘치게 담은 내용에서 어떤 면이 힘을 가지고 있는걸까.
아마 나는, 이미 흐리멍텅해지긴 했어도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정의를 말하고자 했던 <재심>의 노력 그 자체에 감동했던 건 아닐까 싶다. 옳은 것에 대한 단호함이 불쾌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멋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