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이언>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툭 터놓고 이야기하자면 예고편과는 많이 다른 영화다. 뒤늦게 귀국하여 상영시기를 놓치다시피 했는데, 예고편을 보고 어찌나 두근거리는지 꼭 상영관을 찾아 보겠다며 체크까지 해 두었던 터라 기대 역시 컸다. 그러나 영화의 내용은 나의 예상을 무참히 짓밟았다.
맥락을 잘못 짚을만한 이유는 흥미를 유발시킬 소재를 티저로 사용한 점이다. 주인공 사루(써니 파와르: 데브 파텔)은 입양되었고, 이름조차 모르는 기차역 근처에 살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그리고 위성지도인 구글 어스로 원래의 가족을 찾아 나서는 것. 티저의 내용만 보면 언뜻 복잡한 수식으로 이루어진 계산과, 논리로 무장했을 것 같은 줄거리는 예고편만큼의 분량, 딱 그 뿐이다.
관객이 은연 중에 간과하는 것은 인도의 인구와 기차의 상관관계다. 나보다 앞서 영화를 관람한 지인의 후기는 그랬다. 기억과 대조하면 되는 것을 못 찾아 답답하며 단순히 기차역을 모르는 걸로 영화를 이끌어가기엔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인도의 기차역은 아무리 작은 도시라도 웬만하면 한 지역에 2개 이상이 있을 정도이며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철도청까지 다섯 개의 회사가 연합해있고 약 6만 5천 킬로미터의 기찻길이 깔려있다. 그와 더불어 13억 가량의 인구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방 안에 12명 정도의 가족들이 함께 잔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이 고작 인도에 세 번 쯤 다녀온 내가 느끼는 것이니, 그 거대함을 알고 있는 이들에겐 얼마나 위대한 여정인지 새삼 느낄 수 있다.
엄마를 찾아 보긴 했어요?
어느 황무지 같은 시골에서 사는 사루는 대개 그렇듯 가난하다. 돌 나르는 일을 하는 엄마를 도와 돌멩이를 나르기도 하고, 형 구뚜(아비쉑 바라트)와 함께 달리는 기차에 실린 석탄을 훔치기도 하며 산다.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무게를 이고 식당에 가도, 바꿔 주는 것은 우유 두 봉지 뿐. 근교에 일을 하러 가는 형을 졸라 따라 나서지만, 잠시 볼 일을 보러 간 형을 못 기다리고 정차된 기차 안에서 추위를 피하다 잠들고 만다.
콜카타는 뉴델리와 뭄바이를 이어 인도 제 3의 도시일 정도로 거대하며, 세계에서 범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도시 중 손에 꼽힌다. 그러나 그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오래도록 방황하다 경찰에게 인도되는 사루는 수용소와 다름 없는 미아 보호소에 갇힌다.
입양절차를 담당하는 여자는 졸지에 고아가 된 사루에게 입양되는 것을 권한다. 1300만이 신문을 읽어, 하지만 연락이 없었지. 문맹률, 그리고 다시 한 번 실감이 드는 인도의 인구. 우리는 여전히 무심코 한국 기준으로 독자가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인구수를 듣고도 새발의 피라고 생각한다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벵골어는 모르니?
인도에는 약 190가지의 언어가 있고, 스무 개 남짓한 언어가 공영어로 지정되어 있다. 영어마저 상용어로써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사루는 다른 나라에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경찰에 인도되기 전 다른 고아들과 지하도에서 잡혀갈 뻔한 걸 가까스로 탈출한다. 인신매매와 같은 범죄는 흔하디 흔하고, 부패한 경찰은 손을 놓고 있다. 다시 철로를 걷다 괜찮은 사람을 만난 듯 하지만, 그 역시 심상치 않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사루는 다시 한 번 도망쳐 길거리 생활을 하게 된다.
사루는 도망쳐 헤메다 강가에 있는 사원으로 간다. 시바신에게 기도를 하고 난 뒤 먹을 것을 집어먹는 장면에서 영화는 다시 한 번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신이란 무엇인가. 달리는 열차에서 석탄을 훔쳐 우유로 바꿔 마시고, 기름에 튀긴 찹쌀 반죽인 젤라비 하나를 먹지 못해 있는 것이 되새김질 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신에게 기도하는가. 어째서 우린 신에게 바치는 관대함만큼이라도, 가난한 이들에겐 그렇지 못한것인지. 알고 있기로 인도인의 하루 평균 임금은 약 300루피이며, 어린 소년들은 그 5분의 1정도다.
아, 영화 속 등장하는 젤라비는 기껏해야 5루피. 한화로 100원이 채 되지 않는 금액이다.
낳지 않기로 한거야. 불임이 아니라.
결국 호주까지 날아가 입양아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사는 사루. 엄마 수(니콜 키드먼)의 대사는 엄청나다. 자신의 어린 기억을 끄집어 내고 지금의 엄마가 배신감이 들까봐,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는 사루가 입양이란 고리가 없는 보통의 가족으로 이루어졌으면 좋았을거라고. 그렇게 말하자 수는 그 말을 곧바로 부정한다. 존(데이비드 웬햄)과 나는 늘 생각했어, 세상엔 사람이 충분히 많다고. 그래서 낳지 않기로 한거야. 그리고 아이들을 거두어 기회를 주는 편이 낫지 않겠니. 이 말은 입양에 대한 개념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과거까지 떠안아야 하는 각오를 말이다.
사루는 낳아준 엄마를 찾는다. 과정은 생각보다 극적이지 않고, 만나고 난 후로도 감동을 억지로 조장할만큼 분량을 크게 두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그것은 실로 극적이다. 실화를 주물럭거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담담한 힘이 주는 감동. 실화를 소재로 사용하는 영화들이 으레 저지르는 극적인 요소를 강제로 첨가하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 훌륭한 영화로서 자리매김한다.
되려 가족을 만나고 난 뒤, 사루 홀로의 모습을 다각도로 잡으며 관객은 그의 감정과 정체성이 다시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입양되기 전과 후의 합치를 그리는 과정에서의 충돌, 우리가 지독하게 개인적인 그의 감정선을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얼핏 세상에게 버려졌다 여길 수 있는 사람과 그 사람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절망적인 감정이었는지는 영화 말미, 자막으로 뜨는 형 구뚜의 죽음으로 설명된다.
사루가 실종되던 그 날, 플랫폼에서 기차에 치여 죽음을 맞이한 구뚜가 동생을 찾아 얼마나 철길을 헤맸을지. 얼마나 애타게 사루의 이름을 불렀을지, 그가 세상을 등진 이유만으로 우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셰루, 그리고 라이언.
여태 이름을 잘못 발음하고 있던 사루의 원래 이름은 '셰루', 그리고 그 의미는 사자. 즉 '라이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영화가 주는 올바른 힘은 이런 것이 아닐까. 따뜻하면서 선명하고, 무겁지 않은 색감으로 촬영된 필름은 우리가 그의 고뇌를 따라가는데 큰 도움을 준다. 가난과 고아, 거리의 어린이들에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범죄와 입양의 의미까지. 그 중에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입양아가 입양 되면서부터 짊어지게 되는 커다란 자물쇠를 푸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
이제 고작 말이다.
아직까지 입양아에 대한 동정과 불쌍한 마음을 가진 채 혀를 쯧쯧 찰 필요는 없다고. 이 영화는 그러한 동정을 담담히 거절한다. 아직 여전히 무의식 중에 그런 걱정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이 순간 역시 벼랑 끝에 굴러떨어지고 있는 라이언들은 생각보다 강하다. 입양이란 건, 그런 사자들에게 으르렁 거릴 수 있는 방법을. 넌 고양이가 아니라 사자였다는 걸 알려줄 깊은 믿음은 아닐런지.
*이 영화가 아쉬웠던 점은 오롯이 국내 배급사의 몫이다. 극 중반 수(니콜 키드먼)의 한국어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 사루를 향한 대사가 동물 하나 쯤 입양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원어는 전혀 그런 뉘앙스가 아니지만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번역투만 보고 수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판단할 정보가 없기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람의 선함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의심 없이, 염려 없이 보아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