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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Feb 17. 2017

'영화답다'는 것.

영화 <컨택트>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한국 제목인 '컨택트' 대신 원작의 '어라이벌'을 사용하겠습니다.





<컨택트>라는 동명의 작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수입배급사가 이 제목을 택한 이유는, 이런 종류의 논란까지 고려한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과거의 명작과 비견되어 더 많은 인기를 구가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 그러나 사람들은 논란보다는 원성을 택했다. 원래의 제목을 두고 왜 전혀 다른 의미의 영어 제목을 선택했는가하며. 배급사가 고려하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이해도였고, 영화를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한 관객들은 영화를 해석하려는 글들을 쓰고, 읽기 시작했다. 영화를 소모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돈을 지불하고 제작자의 온전한 느낌을 전달받지 못했다고 느꼈을 때의 부당함을 참진 않는다.






정답은 이미 나왔다.



딸의 이름에 대한 시퀀스는 훌륭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절름발이가 범인'과 같은 유치한 장난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런 설정을 동원해 직접적으로 떠먹여주지 않았다면, 미리 눈치챈 이들에겐 더욱 강렬한 요소가 되었겠으나 과하다 싶게 짤막한 기억들은 지루하다.



전 세계 곳곳에 갑자기 등장한 외계인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군대에선 암호해독의 전문가인 루이스(에이미 아담스)와 이안(제레미 레너)를 데리고 간다. 정체불명의 쉘에서 몇 번이나 외계문명과 조우할 때, 상대를 좀 더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 루이스의 적극성으로 그들의 언어는 점점 해독된다. 언어 해독 중 루이스는 중간중간 짤막한 기억의 노이즈를 겪는데 이는 언어를 알게 되며 얻는 일종의 보상.



공포에 떨며 혹은 답답함에 무력 충돌을 일으키려는 다른 강대국들 사이에서 결국 미국도 강경노선을 취할 수 밖에 없는데, 루이스는 홀로 쉘에 다녀온 뒤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곧 일어날 대규모 전쟁을 막는다.






운명에 대하여



어라이벌은 운명을 말하고 있다. 어쩐지 무속신앙이나 <아바타>에 등장할 법한 무게로 기본 가설의 바탕을 둔다. 외계의 언어를 배우고 파악하게 되는 순간, 마치 사전처럼 인간은 기억을 마음대로 꺼내 뒤질 수 있게 된다. 물론 미래의 일들까지도.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영화가 집중하는 부분은 살짝 다르다. 인과관계를 알지언정 바꿀 수 없는 것은, 정해진 운명으로 귀결된다.



미래를 알게 되었을 때, 행복과 불행을 겪는 요소들을 이미 체감상 겪게 됨에도 인간은 다시 그것들을 반복할 마음이 들까. 아마 알 수 없는 것들에게서 얻는 감정을 상실당하며 회의감에 휩싸이거나 삶이 시시껄렁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외계인들이 무기를 주고 간다고 표현하지만 과연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무기가 될 것인가는 개인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으레 공상과학영화에서 자행되는 일을 어라이벌도 피해갈 순 없었다. 전 인류적 희생이 따르는 일에 개인이 희생되는 역할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이 얼마나 폭력적인가. 아빠가 힘들어져서 떠났다고 딸에게 말하는 장면, 루이스가 받게 된 보상. 과연 그것이 무기 혹은 힘으로써 결코 좋은 건 아니라고.





극적인 요소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어라이벌은 불친절하고 폭력적인 영화다. 관객에게 설명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없으며, 영화니까 이해해 라는 투의 전개는 난해하다. 영화 말미 순식간에 전개되는 스토리는 반전의 속도감을 노린 듯 재빠르다. 그러나 여태 과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지식들을 동원하던 감독은 자포자기한 듯 막무가내로 감상적이다. 영화를 망가뜨리는 일에 일조하며, 주인공은 갑작스레 그들의 언어를 읽게 되고, 모든 것이 계산된 것처럼 이어진다. 정말이지 '영화답다.' 그렇게 사람들은 여태껏 습득한 철학적 고찰을 판타지로 기억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감독이 주려는 고찰은 물론 이것이 아니었겠지만, 심성이 삐딱하여 이런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과연 극적인 것들이 꼭 필요한 것인가. 상업이 혼합된 종합예술의 결정체인 '영화'는 결국 그 고민을 오롯이 떠안을 수 밖에 없구나 하며 씁쓸하다. 그리고 더욱 아쉬울 수 밖에.





충분한 가설임에도 불구하고 제작자는 휘둘린 느낌이다. 심지어 앞부분은 살짝 졸기까지 했는데, 감독이 아득바득 우겨서 러닝타임을 늘려 충분히 완성도를 올렸다면 나는 스스로를 책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과는 뻔했다. 떡밥을 펼쳐 놓고 회수하지 못해, 허겁지겁 두루뭉술하게 어수선한 판을 정리하는 느낌이라니.



여태의 판이 그랬고, 더군다나 제작비가 많이 드는 공상과학영화들은 더더욱. 모두가 <인터스텔라>를 꿈꿀 수 없겠지만 때론 그런 과감함과 우직함이 먹히는 법이다. 적당히, 그리고 적당한 영화를 만들 것이 아니라면. 좋은 시나리오를 멋지게 만들 자신이 있다면, 충분히 밀고 나갈 용기가 있어야 한다. 어느 때든.




우린 예술이 예술로 보장받을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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