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문라이트>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라이트는 거친 보이후드같다. 이 '거친'이라는 의미는 흑인의 이미지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결코 아니다. 되려 블랙 보이후드라는 표현이 더 인종을 인식하게 만들지 않나 싶어 한참을 고른 단어는 그랬다. 유명한 성장 영화 <보이후드>보다 더욱 담담하고 무뚝뚝하게. 벌써 이 영화를 보고 일주일이 가까운 시간동안, 바로 후기를 쓰지 못할만큼 많은 문제를 던져 준 무게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그리고 멀리 있지도 않는 것들이어서.
소년에서 사춘기로, 그리고 어른이 되기까지. 문라이트는 3막으로 이루어진 주인공의 성장기지만 이름은 철저히 다르다. 같은 사람임에도 불리는 명칭이 달라지는데 그 때때마다 불리는 이름으로 시간의 흐름을, 사람의 인생을 표현한다. 이윽고 완성되어가는 그 성장과정은 나이가 먹었다 해서 끝나지 않는다.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 인생이란 그렇게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것 쯤은.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마약상 후안(메허샬레하쉬바즈 엘리)은 여자친구 테레사(자넬 모네)와 함께 살며, 지역에서 꽤 알아주는 거물이다. 따돌림을 당해 도망치던 리틀(알렉스 R. 히버트)이 자신의 약창고에 숨어있는 걸 발견하고 그는 리틀을 집에 데려가 재운다. 몸을 팔며 늘 약에 취해 있는 리틀의 엄마 폴라(나오미 해리스)는 리틀을 잘 돌보지 않고, 그렇게 자주 리틀은 후안에게로 도망간다.
동정심인지 이타심인지, 후안은 리틀이 올 때마다 잘 보살펴주고 수영도 가르친다. 따돌림을 당하는 리틀에게 힘이 되어줄 법하지만, 그는 결코 괴롭히는 친구들 앞에 나서는 법이 없다.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미루지 마. 그는 그저 그렇게 조용히 인생을 가르쳐 줄 뿐.
공차기를 하며 놀던 도중 따로 떨어져 나온 리틀을 따라온 친구는 그렇게 말을 건다. 덤벼봐, 모두가 널 얕보지 않도록. 도대체 왜? 싸우기 싫어하는 것은 왜 잘못이 되어야 할까. 잡아먹히지 않도록 단련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경쟁을 싫어하는 리틀에겐 더욱 더. 그러나 이미 어른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 질문은 칼이 되어 꽂힌다. 마냥 리틀을 응원할 수 없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현실은 잔인하게도 녹록치 않으니.
한밤 중 찾아온 리틀이 느닷없이 묻자 후안은 마지 못해 대답한다. 리틀의 엄마 폴라가 자신의 구역에서 약을 하는 걸 목격하고, 가서 아들을 잘 돌보라고 말하지만 폴라의 말에 후안은 대꾸할 수 없다. 네 아들이야? 그럼 데려가서 키워. 난 여기 와서 약을 살거야, 꼭 너에게만 살거야. 사람을 망가뜨리는 마약으로 돈을 버는 후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렇게 후안은 아무런 표정없이 묻는 리틀의 말에 마음이 무너져버린다.
고개 숙이지 마. 여기는 사랑과 자부심 밖에 없어.
시간이 흘러 후안은 죽고 여전히 그 집에 오는 샤이론을 테레사는 엄마처럼 돌봐준다. 학교는 어땠는지, 이부자리를 직접 펴주기도 하며. 대답조차 잘 하지 않던 리틀 때와 달리, 샤이론은 곧잘 말한다. '괜찮아요.' 아니 전혀 괜찮지 않다. 괴롭힘은 점점 심해지고 폭력까지 당하는데 손을 쓸 방법이 없다. 그를 대신 때리라고 종용하여 샤이론 앞에 선 사람은, 유일한 친구 케빈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의 괜찮다는 말이 테레사의 걱정을 염려해서라는 것도 우린 이해할 수 있다.
샤이론은 케빈과 바닷가에서 만난다. 미묘한 분위기 속 케빈과 키스를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샤이론, 그러니 그의 주먹에 맞아 쓰러졌을 때의 기분은 얼마나 참혹했을까. 스크린에서의 동성애 장면은 꽤 익숙해졌어도 흑인 자체도 보기 힘든 한국에게 아직 이 장면은 낯설다. 그렇기에 더 가슴 속 깊이 다가서는 그 낯선 장면을 보여주며 영화는 다시금, 편견에게 묻는다. '흑인 역시 당신들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산다.'
폴라의 상태는 점점 심각해져서 샤이론이 테레사에게 받은 돈 마저 약을 사기 위해 빼앗는다. 테레사를 질투하며 독설을 쏟아내는 폴라는, 어린 시절의 리틀에게도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했었다. 온갖 종류의 폭력에게 그 어떤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그는 블랙으로 성장한다. 어릴 때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후안과 같은 모습, 두건까지 그럴싸하게. 블랙은 마약상이 된다.
엄마, 제발. 약을 하는 엄마를 증오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서. 약으로 비뚤어져 답답할만큼 집착만 남은 엄마에게 블랙은 소리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떠나지 않을거라는 엄마의 말에 펑펑 울다, 결국 다가가서 안아주는 것. 부모의 역할을 하지 못한 자신의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블랙은 그녀를 버릴 수 없다.
요리사가 된 케빈은 블랙에게 전화한다. 주크박스에서 손님이 튼 노래를 듣고 네 생각이 났다며, 다소 올드한 대사에 블랙은 다시 설레고 만다. 한참을 고민하다 케빈의 음식점 앞까지 찾아가서는 짧은 머리를 오래도록 정성스레 정리한다. 그 풋풋함에 난 함께 들뜨고 만다.
특별요리까지 대접하며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아이까지 낳은 케빈은 야속하게 말한다. 내가 상상한 모습은 아니었어. 그리고 블랙은 대꾸한다. 그럼 어떨 줄 알았는데. 이 영화 속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샤이론을 묻던 유일한 사람. 케빈 역시 변한걸까. 그는 늘 그렇게 물어왔다.
넌 누구야?
샤이론을 아끼던 케빈은, 누구를 모방하고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충분히 가지고 있는 강인함. 원래의 본질을 보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을지. 그렇게 달빛 아래에서 잔잔하고 푸른 빛으로 영화는 마무리 된다.
문라이트는 인생의 중요한 세 지점을 보여준다. 물론 인생이란것이 중요한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생의 큰 줄기를 결정지을 그 중요한 지점들이란 나머지 부분까지 유추할 수 있는 포용력. 그것이 삶의 온전한 힘이라는 걸 문라이트는 은근히 드러낸다.
말미에 블랙이 되어 후안을 따라한 듯한 샤이론의 그 모습은 어쩐지 낯설다.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았음에도, 그러나 또 그럴 법하다 생각이 드는 그의 선택. 그 선택은 어디선가 또 다른 리틀을 발견하고 후안의 역할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마지막까지 던져준다. 어느 한 사람의 인생이 밀려온다는 느낌은 이와 같아, 이내 삶은 그렇게 무덤덤한 위로를 받는다.
언젠가 직면해야 할, 편견에 맞서는 일을 이토록 세련되게 할 수 있던가. 처음 느낀 감상은 그랬다. 등장인물 모두가 흑인인 것에 대하여,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비일상으로 느껴지는 것들에 대하여. 이 감동이란, 피부색 말고는 구별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 색에서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도 특별할 것이 없는 영화가 된다. 나는 부디, 그렇게 됐으면 한다.
지금의 괜찮은 달빛 아래서, 우리 모두는 파랗게 빛이 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