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원망 하나는 기가 막힌다. 여행이 걷잡을 수 없이 유행으로 번진다한들, 고작 반 년 여행에 책을 내고 스타가 되는 것을 보면 욕을 뱉고. 한심한 내용에 다시 혀를 끌끌 찬다. '내가 책만 낸다면 너희들 따위야..' 참 비겁하다 비겁해. 마치 세상이 날 도와주지 않는 것처럼. 마케팅도 실력이라지만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 타지에서 본 수많은 세계 여행자들. 나의 일 년 남짓한 여정은 어디서 명함도 못 내미는 훨씬 엄청나고 방대한 세계를 겪고 와서.
나 까짓 게 무슨.
책을 내보라는 지인들의 권유에 대한 반응은 참으로 일관되다. 쉽게 말하는데 마음대로 팔려야 말이지. 한 때 유행하던 것들처럼 여행 카테고리도 나올만한 이야기는 전부 나왔으니 꾸역꾸역 자리는 잡을지언정 독보적이긴 힘들다는 생각. 요즘 사람들, 긴 글도 잘 못 읽고 말이야. 만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바닥부터 올라가려면 중간에 게임 오버 수백번은 당하지 않을까. 악마는 사람의 시기와 욕망 따위를 먹고 산다던데, 내게 왔다면 실적깨나 올렸지 싶다.
서점을 참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책이 가득 쌓인 공간의 종이 냄새를 좋아한다. 친척 중, 공부 잘 하는 사람이 있었다던데 물려받은 책들의 가득 찬 그 냄새가 좋았다. 알차게 글을 삼키기엔 내 나이보다 어려운 책들이었어도 냄새만큼은 같았다. 어려운 집안 살림에 쫓기듯 이사한 시절에도 책은 단 한 권도 버려진 적이 없다. 풀어놓을 곳이 없어 풀지 못한 책은 짐이었어도, 책 내음에 파묻힐 서점이 가까웠으니 난 자주 그 곳을 향했다. 난 그때, 분명 서점을 좋아했다.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위인전을 읽어주던 엄마가 내게 그랬다. 위인전의 다양한 사람들을 보고도 엄마는 '훌륭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지금 읽고 있는 나폴레옹이 비단 훌륭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일이 아니라 생각한 엄마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책을 읽으면 좋든 나쁘든 간에 무엇이라도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판단은 슬프게도 결과가 더디다.
엄청난 사람들, 대단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훌륭한 사람은 몇 만나지 못했다. 나 역시, '이 사람은 책을 내도 될 법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이들은 그런 것에 되려 시큰둥했고 그런 목적으로 자신의 여행이 판단되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하기도 한다. 한국에 돌아와 정말 조용히 평범히 사는 경우도 있다. 어떤 종류의 '그것'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라니, 정말 강하구나.
모든 인류를 순서대로 줄 세운다면 나는 몇 번째일까. 인구의 절반은 앞지르려나. 그나마 희망적인 소식은 내 앞의 인류도 지금 이 순간, 죽어가는 사람이 있을 테니 순위는 계속 올라가고 있지 않을까. 아니, 애완용 개가 부자들의 유산을 물려받고 나보다 앞 빈 자리를 그대로 차지할지도 모른다.
불쾌한 공허에 혀를 끌끌 차며 서점 밖 회전문을 지나 나오니 눈발이 날린다. 내 하소연을 전부 책으로 푼다면 낭비될 종이에 용서를 빌어야 하니 악마에게 치러야 할 죗값도 눈덩이처럼. 내가 동경하는 그 멋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과연 어디서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커피 한 잔 하며, 차가운 바깥 세상을 약 올리며. 카페 의자에서 속삭이고 싶다. 그대의 여정은 어땠는가.
2달러짜리 식사에 길들여진 내가, 20달러짜리 한국식 브런치는 먹어본 적도 없으나 글을 쓴다.
20달러어치 글을 쏟아내 보련다.
photographed by Soj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