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건방진 왕따

Fight with unwinnable enemy-Don Quixote

by 박하


오래간만에 느끼는 행복이다. 눈이 내려 학교를 가지 않으니 오늘 신나게 놀다 어쩌면 내일 늦잠을 자게 되는 건 아닐까. 그래, 엄마에게 준비물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 난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다. 고작 쉬는 날 하루 따위야 내일의 등교를 신경 쓰느라 금세 지나가 버린다. 맞다, 신나게 놀다 늦잠을 자게 되길 바라는 건 다른 아이들. 어쩜 어른도 늦잠을 자진 않을까. 수업할 선생이 오지 않으면 어떨까.


난 오늘도 지각하지 않았다.


어제 내린 눈이 그치고 더 이상 눈은 내리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복도에 나가 앉아야 한다. 눈이 온 뒤엔 꼭 날씨가 포근해지는 것이 신기하지만 방심은 금물. 역시 두터운 외투를 가져오길 잘했다. 이는 닦지 못했지만 냄새가 배는 메뉴는 없어서 바로 옷을 입어도 괜찮다. 책상과 걸상을 들어 복도로 나간다. 복도 벽 창틀 아래는 신발장을 겸하고 있어 발 냄새가 조금 올라오긴 했지만 복도 사이로 통하는 바람에 날려 맡을 새가 없다. 단열재는 분명 복도에 쓰이진 않았다.


DSC04003-2.jpg 볼리비아, 소토마요 (2014)


수업이 들린다. 교과서를 펼치고 있어도, 보이는 것을 전제로 가르치는 선생의 수업은 친절하지 않다. 포기하고 읽던 책을 꺼내 펼치자 교실 문이 열리고 여선생이 나온다. 이름이 뭐더라, '천'씨 였던 건 기억하는데. 아직도 반성안했냐고 묻는 말에 글쎄. 잘못인지 아닌지 아직 판단이 안 서니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내게, 천 선생은 다른 교실의 선생들까지 나와볼 만큼 소리를 지른다. 벌써 일주일 째. 죄명은 '편식', 단지 김치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참 시끄럽네. 어디까지 읽었더라.




무리를 짓지 못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었다. 한 달이나 지속된 복도생활이 교장의 만류로 그칠 무렵까지 같은 반(정확히 말하면 교실 안의) 아이들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두 배가 넘는 신장의 여선생을 아직 맞설 수 없는 거대한 것이었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이 당연하다.


진학은 더 넓은 범위의 정글이었고 호랑이나 사자는 없었다. 하이에나들만 득실거리는 교실에 선택할 것은 단 한 가지, 어느 하이에나 무리에 드느냐. 꼴 사나운 발상에 코끼리를 추구한 결과는 따돌림이었다. 작은 학교라 매점이 없어 빵을 사 오라는 한심한 일은 없었어도, 주번이나 우유 당번은 참 순서가 쉬이 돌아가지 않았다. 매번 지독한 분필가루를 마시는 날 곧게 본 선생은 신뢰였는지 동정이었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을 줬다. 선생의 힘을 업고 따돌림에도 반드시 사수한 것은 창가 쪽 맨 뒷자리였으니, 난 분명 코끼리였다.


볼리비아, 수크레 (2014)


맨 뒷자리는 그만큼 독보적이었다. 으레 우위를 차지한 녀석들의 고정석에 앉아 있는 초식동물은 시시껄렁한 일들을 당해야 했다. 책상 서랍 속 책들을 교실 뒤편에 내던져 쌓아놓는 일이야 부지기수였고 의자를 운동장에 내다 놓거나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나의 영역을 포기하지 않는 일은 꾸준했다. 참으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괴롭힘이었다.


흔들림 없이 곧은 시선은 왕따 주제에 참으로 건방진 태도였지만, 그건 고양이와 같이 맹렬하고 차가운 것이었다. 녀석들의 작전은 곧 바뀌어 나는 돈을 빌려주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돌려받은 기억은 많지 않아, 둔하게도 순수한 대출로만 알았으니. 거대한 몸집의 코끼리를 함부로 물고 뜯는 일은 터지지 않은 채 시간은 흘렀다. 딱 그 정도까지만 치사한 시대였다.




그 아이도 역시 불편했을 터, 말을 하지 않은 채 몇 해가 지나 서먹한 사이. 기억을 잊어야만 하는 거리의 사이가 됐다. 홀로 시간을 보내는 법을 숙련했고, 당시 유행했던 게임방은 일행 없이도 잘만 간다. 그날따라 게임방을 가는 일이 어쩐지 고민이 된 것은 그 아이가 있는 느낌이 들어서였나. 어색하게 마주한 시선에 모른 척을 하기도 늦었지만 나의 형편으로 아이를 걱정해야만 하는 것이 메스껍다.


마주쳐야만 하는 협소한 공간과 그 공기가 기분 나빠 대뜸 인상을 찌푸린다. 나와 가장 친했다가 따돌림을 앞장섰던 녀석을 대하는 방법은 절대로 알 수 없다. 새로 산 가방에 썩은 우유를 던지며 웃던 녀석들의 옆 자리에 서 있는 아이가 여기 있다. 그와 마주한 공간에 있으니 소란한 게임방에 정적이 흐른다.


DSC06865.jpg 돈키호테와 산초. (마드리드, 2014)


욕지기를 참으며 초코파이 하나를 사 집어 들고 건넨다. 어리둥절한 아이를 놓고 집에 돌아간 그다음날, 빌어 처먹을 하이에나들은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는다. 아이의 말로 정말 단순하게 괴롭힘은 사라졌다. 허탈하게도 순식간에 게임이 끝났다. 내 세상은 딱 초코파이 한 개의 무게.


그 추운 겨울.

그래, 복도에서 읽었던 책은 분명 돈키호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