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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 불복종

권력의 비열한 세계.

by 박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군 시절의 기록.


내가 사용한 수첩은 열일곱. 전방 수색중대로 배치, 복무기간 이십일 개월. 부대 부적응자로 낙인찍혔으며 장교 하나가 파면되었다. '군대는 처절한 공산주의다, 군 복무란 공산주의가 얼마나 x 같은지 이십일 개월을 몸소 경험하는 것.' 수첩의 마지막 장, 마지막 줄.




야, 이리와 봐.


동생은 감기가 지독히 걸려 콧물이 샛노랗다. 이-엠-이-알-지-이-엔-씨... 글자를 미처 읽기 전에 건너편에서 괴물이 부른다. 총을 든 호랑무늬의 괴물. 가까이 가면 큰일 난다던 엄마의 말대로 큰일이 난 건가. 동생 손을 잡고 뒤돌아 뛰려는데 남자가 옷깃을 잡았다. 큼지막하게 알파벳이 적힌 껍질은 읽지 못해도 단번에 알아챈 초콜릿.


페루, 쿠스코 (2013)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미군 부대였다. 파란 눈에 부리부리한 코, 흰 얼굴은 어딘가 무서웠어도 까만 머리 형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부대는 좀 많이 바빴다. 중간에 할아버지 한 명을 만났고, 뒷짐을 지고서 우릴 데리고 들어온 형과 이야기를 하다가 경례를 받았다. '충성' 난 그 순간 감탄사를 뱉는다. 멋지다. 할아버지가 데리고 들어간 건물은 칙칙했고 냄새도 좀 났다. 과자가 잔뜩 있었고 아무거나 고르라는 말에 잔뜩 겁을 먹어 붕어싸만코를 집었던 기억이 난다. 동생은 감기가 걸려 코를 소매에 닦으면서도 날 따라 붕어싸만코를 집었다.


형들은 볼을 자꾸 만졌다. 내 볼은 만지게 내버려두어도, 동생 볼을 만질 땐 그들의 손을 쳐냈고 그때마다 그들은 이상한 환호성을 질렀다. 문득 눈에 들어온 메달을 빤히 본다. 유리 장식 안에 진열된 훈장들. 형들은 그건 줄 수 없다고 했다. 맞다, 그땐 PX에서 계급장과 같은 것들을 팔았다.


"총도 팔아요?" 그런 질문도 했다. "백만 원이야. 대따 비싸지." 난 세뱃돈을 모아 사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소총이 삽 십만 원 정도밖에 하지 않는다는 건 입대를 하고서야 알았지만, 살 수가 없다는 것은 진작 알았다. 군 생활이 삼 개월, 육 개월, 십이 개월이 지나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전역 병장의 이야기가 사무친다. 군대에서의 자부심이나 정신적, 신체적 폭력이 합당하지 않을 때에도 그것은 설명되어지지 않는, 설명될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지독한 명령이었다.


나이가 많은 간부들은 딱 나이만큼 더 야비했다. 계급은 언제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좋은 수단이었다. 그러니 엎드려 뻗치라는 말을 듣지 않은 병장을 앞에 두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것은 당연지사. 징계는 치열했다.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폭력과 폭언, 당직시간에 불러 어깨를 주무르게 시키는 일까지. 평소 참 말없던 병사가 모든 것을 까발릴 때, 병사들은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 쉬쉬했다.


개를 패 죽이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반항하다 어느 순간, 힘을 잃는다. 눈동자에서부터. 그런 시선을 받았다. 일 년이 넘도록 교육되어 온 두려움은 어느 새 혼자의 싸움이 된다. 제한된 공간에서의 한계와 차이가 극명했으니 승산이 없어 보였겠지.


볼리비아, 수크레 (2014)


부하들에겐 폭력을 상관들에겐 아양을. 장교의 편이 더 많았던 징계는 저열한 꼬투리 잡기였다. 그들은 징계를 미뤄 나의 뒷조사를 했으나 털어낼 것이 없었고, 이는 정치판에서 보던 일들과 흡사했다. 이것이 마흔을 넘은 아버지 뻘 인간들의 방식이었다. 경멸스러운 시스템. 자살이 염려될 만큼의 길고 끈질긴 공격에, 행정보급관은 타 부대 정신상담사를 붙여주기까지 했다.


내부고발자나 명령 불복종 같이 상황을 심각하게 부풀리는 단어는 익숙했고, 같은 사병을 때리라는 명령을 듣지 않아 엎드려 뻗치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들었다고 그 상황을 설명하며 우습기까지 했다. 난 초연히 연대장과 사단장을 내 편으로 만들어 싸웠다. 그 후, 접근금지 명령과 파면대기가 떨어진 뒤에야 그 전쟁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당직 날, 심심하다며 새벽 두 시에 부대원들을 전부 깨워 서로 칭찬하는 시간을 가진다. 술을 마시고 와 자는 병사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흰 장갑을 끼고 나타나 먼지가 묻지 않을 때까지 밤새 청소를 시킨다. 마음에 들지 않는 병사의 우편물을 압수하여 한 동안 주지 않는다. 병사의 여자친구에 대한 성희롱을 한다. 가끔 어느 병사의 성기를 만지기도 한다.


힘들진 않았으나 탈출할 수 없기에, 분명 잔혹한 시간들. 어렸을 때 군인이, 도대체 군대의 무엇이 멋졌던 걸까. 왜 총을 사려했던 거지. 긴 시간 배운 살상 교육. 비무장지대의 수색작전 중, 그 장교의 말이 맴돈다.


"전쟁이 나면 난, 너희부터 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