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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Apr 27. 2017

내가 머물 자리

공간에 길들여지는 일.


나는 담담했어야 했고 집에 대해선 미련이 없어야 했다. 동생과는 고작 십삼 개월의 터울뿐이라 진즉 형 행세를 해야 했기 때문에. 미리 어른인 척을 해 온 탓에 풀지 않은 짐을 궁금해하여 모두 뜯는 사고 같은 건 치지 않았다. 이불에 오줌을 싸는 일 역시. 왜 허름한 집으로 떠나야 했었는지 궁금했지만 그렇지 않은 척, 참 가만히도 살았다.




주택의 골조를 그대로 드러내는 구조가 유행을 타는 지금과 달리 천장의 시멘트가 드러나던 나의 집 안은, 끝까지 깔리지 못한 장판과 함께 가난함이 드러나 보였다. 가족 넷이 나란히 누워 잘 때면 온기가 들어오지 않는 끝을 내가 늘 차지했다. 조금씩 가족을 밀며 바닥의 온기를 찾아 나서는 일이 밤 중에도 꼬박 이루어졌지만 서늘한 사이로 군데군데 멍처럼 들어오는 온기가 꽤 기분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가끔 나는 그 좁디좁은 공간에다 학교 앞 팔던 병아리나 문방구의 햄스터를 키워내기도 했다. 비루한 집만큼이나 비루했던 라면 박스에서. 무럭무럭 자라길 기대한 만큼 꽤 여러 번 생명이 사라지는 동안 나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따뜻하고 편안한 집을 가져야겠다는 꿈이 딱 그 맘때 뿌리내렸다. 그리고 텃밭에 무덤을 몇 번, 만들어야 했다.




텃밭이 창보다 높게 있던 그 집은 사실 집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어색해, 만약 인격이 있었다면 스스로도 부끄러워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왜 괜찮았던 집을 두고 이런 창고 같은 곳에 살아야 하는가는 물음을 해결하기엔 덜 자란 내가 흥미를 느낀 시간은 사흘 남짓, 수련회 같이 불편한 자리에 대한 인내가 사흘쯤이듯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네 싶었다.


지금은 그것이 집이 아닌 곳에 온돌을 깔기 위한 이유임을 알게 됐다. 당시 집 안에 있던 콘크리트 턱은 마치 좌식 테이블이 있는 식당들처럼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했는데, 그리하여 난 늘 외식을 하기 위해 집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런 곳에서 삶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은 참 낯설어 난 나의 일곱 인생이 쉬이 상상되지 않았다. 어쩌면 관처럼 이대로 여기서 늙는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우습게도 그 중간이 없었다.


하다못해 작게 볕이 들어오는 창이라도 있었다면. 반지하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오지 않는 해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은 모든 걸 죽이기에 충분했다. 원래 머물던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거란 희망도.






집을 가지고 싶어.


‘전세 대란’, ‘부동산 거품’ 같은 어려운 말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집이 충분히 비싼 물건이라는 건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왜 나에게 나의 독립된 방을 주지 않았나 철없게 따지고 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벽이 늘어날수록, 볼일 볼 공간이 하나 더 생길수록. 값은 터무니없이 높았고 부모님은 최선을 다했다.


단출한 부엌에 식기가 하나 둘 늘어가고 하나뿐인 불로 엄마가 온갖 요리를 해낼 때, 작은 철제 밥상이 목제로. 그리고 최근에서야 의자가 마련된 식탁이 생겼을 때. 나는 내심 감격했다. 잠버릇이 심한 동생과 고작 몸 누일 방 안에서 한 이불을 덮을 시절이 지나 각자의 침대가 생겼을 때도. ‘집’이라는 것이 이내 쉴 공간으로써 역할을 하게 됐을 때 말이다.




나랑 살래?


친구들을 모아 살아보자. 연일 고공 행진하는 집값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다. 단순한 룸메이트 말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집이란 공간을 함께 사용하자는 생각은 친한 몇 명에게만 알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와 사는 일까지 사랑하게 될 진 모르겠어도 그냥 그러고 싶다는 소망을 수줍게 표현해봤다.


어쩌다 여행하는 삶이 되어 어디서든 잘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한들, 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떠난 적이 없었다. 모든 공간이 나의 집처럼, 공간에 길들여진다던 고양이의 삶과 같이. 오늘 묵게 될 숙소를 빠르게 파악하여 가장 편안히 이용하려 노력해봐도. 난 오래된 골동품 같은 햇살이 채워져 있는 공간을 꿈꾸고 있다.


욕심을 부려봐도 되지 않을까.

내 손 때로 까맣게 된 책들이 가득 채워진, 노란 저녁 빛 드는 방 하나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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