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하 Apr 27. 2017

내가 머물 자리

공간에 길들여지는 일.


나는 담담했어야 했고 집에 대해선 미련이 없어야 했다. 동생과는 고작 십삼 개월의 터울뿐이라 진즉 형 행세를 해야 했기 때문에. 미리 어른인 척을 해 온 탓에 풀지 않은 짐을 궁금해하여 모두 뜯는 사고 같은 건 치지 않았다. 이불에 오줌을 싸는 일 역시. 왜 허름한 집으로 떠나야 했었는지 궁금했지만 그렇지 않은 척, 참 가만히도 살았다.




주택의 골조를 그대로 드러내는 구조가 유행을 타는 지금과 달리 천장의 시멘트가 드러나던 나의 집 안은, 끝까지 깔리지 못한 장판과 함께 가난함이 드러나 보였다. 가족 넷이 나란히 누워 잘 때면 온기가 들어오지 않는 끝을 내가 늘 차지했다. 조금씩 가족을 밀며 바닥의 온기를 찾아 나서는 일이 밤 중에도 꼬박 이루어졌지만 서늘한 사이로 군데군데 멍처럼 들어오는 온기가 꽤 기분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가끔 나는 그 좁디좁은 공간에다 학교 앞 팔던 병아리나 문방구의 햄스터를 키워내기도 했다. 비루한 집만큼이나 비루했던 라면 박스에서. 무럭무럭 자라길 기대한 만큼 꽤 여러 번 생명이 사라지는 동안 나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따뜻하고 편안한 집을 가져야겠다는 꿈이 딱 그 맘때 뿌리내렸다. 그리고 텃밭에 무덤을 몇 번, 만들어야 했다.




텃밭이 창보다 높게 있던 그 집은 사실 집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어색해, 만약 인격이 있었다면 스스로도 부끄러워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왜 괜찮았던 집을 두고 이런 창고 같은 곳에 살아야 하는가는 물음을 해결하기엔 덜 자란 내가 흥미를 느낀 시간은 사흘 남짓, 수련회 같이 불편한 자리에 대한 인내가 사흘쯤이듯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네 싶었다.


지금은 그것이 집이 아닌 곳에 온돌을 깔기 위한 이유임을 알게 됐다. 당시 집 안에 있던 콘크리트 턱은 마치 좌식 테이블이 있는 식당들처럼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했는데, 그리하여 난 늘 외식을 하기 위해 집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런 곳에서 삶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은 참 낯설어 난 나의 일곱 인생이 쉬이 상상되지 않았다. 어쩌면 관처럼 이대로 여기서 늙는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우습게도 그 중간이 없었다.


하다못해 작게 볕이 들어오는 창이라도 있었다면. 반지하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오지 않는 해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은 모든 걸 죽이기에 충분했다. 원래 머물던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거란 희망도.






집을 가지고 싶어.


‘전세 대란’, ‘부동산 거품’ 같은 어려운 말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집이 충분히 비싼 물건이라는 건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왜 나에게 나의 독립된 방을 주지 않았나 철없게 따지고 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벽이 늘어날수록, 볼일 볼 공간이 하나 더 생길수록. 값은 터무니없이 높았고 부모님은 최선을 다했다.


단출한 부엌에 식기가 하나 둘 늘어가고 하나뿐인 불로 엄마가 온갖 요리를 해낼 때, 작은 철제 밥상이 목제로. 그리고 최근에서야 의자가 마련된 식탁이 생겼을 때. 나는 내심 감격했다. 잠버릇이 심한 동생과 고작 몸 누일 방 안에서 한 이불을 덮을 시절이 지나 각자의 침대가 생겼을 때도. ‘집’이라는 것이 이내 쉴 공간으로써 역할을 하게 됐을 때 말이다.




나랑 살래?


친구들을 모아 살아보자. 연일 고공 행진하는 집값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다. 단순한 룸메이트 말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집이란 공간을 함께 사용하자는 생각은 친한 몇 명에게만 알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와 사는 일까지 사랑하게 될 진 모르겠어도 그냥 그러고 싶다는 소망을 수줍게 표현해봤다.


어쩌다 여행하는 삶이 되어 어디서든 잘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한들, 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떠난 적이 없었다. 모든 공간이 나의 집처럼, 공간에 길들여진다던 고양이의 삶과 같이. 오늘 묵게 될 숙소를 빠르게 파악하여 가장 편안히 이용하려 노력해봐도. 난 오래된 골동품 같은 햇살이 채워져 있는 공간을 꿈꾸고 있다.


욕심을 부려봐도 되지 않을까.

내 손 때로 까맣게 된 책들이 가득 채워진, 노란 저녁 빛 드는 방 하나쯤은.

매거진의 이전글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