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에서.
바쁘진 않았지만 칼바람을 맞고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컵라면 하나에 2500원을 말하는 바닷 사람들과 실랑이를 하기도 싫었다. 잠시 쉬고 가라며 팔을 붙잡는 아줌마를 내치고 다시 자그마한 역사로 들어갔다. 청량리에서 밤새 달려 도착한 정동진은 하필 날이 궂어 해를 볼 수 없었다. 날이 밝아지긴 했는데 해무가 그득하여, 또 이 기차를 놓치면 두 시간이나 멀뚱히 기다려야 한다 하여. 금세 돌아가는 기차편에 다시 올랐다. 온 길 그대로 달리는 기차안에서 생각이 난 태백 사는 녀석에게 연락을 했다. 나 지금 갈거야. 아, 어설프게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벽 공기의 냉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난생 처음 떨어진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기차역 주변 탐방이라고 밖에 없다. 터무니없던 라면의 가격 때문에 궁한 지갑도 열지 못하고 굶었더니 밥 때를 놓친 위장이며 빈 속은 말이 아니다. 국밥집 몇 곳 앞에서 서성이다 아침식사를 하는 곳이 없어 이왕 참은 김에 까짓 더 참기로 한다. 삼십분 쯤 남은 약속시간. 식객으로 비빌 친구는 대학시절에 사귄 녀석이었다.
이런 기온을 한국에서 겪기란 어려운 일이어서 짐짓 놀라고 만다. 불지도 않는 바람에 한기만으로 뼈를 아리게 하는 느낌이란. 폐에 찬바람이 들어 헛기침 가득 내뱉으며 말하는데. '여기가 바로 태백산맥이다.’ 외치는 듯. 이내 자동차 조수석의 창문이 내려가고 친구는 손을 흔들고 있다. 여기야.
녀석은 어머니와 같이 나왔다기에 예의를 차려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우리는 간판조차 없는 허술한 삼겹살 집에서 고기를 구웠다. 내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 하는 품새가 이상했다. 과하게 격식을 차리는 모습은 남과 같아 보였다. 어머니, 고기 다 익은 것 같은데요. 먼저 드세요. 물 더 갖다 드릴까요. 차라리 시끄러우면 모를텐데, 작은 고깃집에서 이른 점심식사를 들고 있는 이는 우리 뿐이었다.
세 명 모두의 연결고리가 허술한 이 느낌이란 처음 만난 모임처럼 이상해서 나중에야 물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풍차가 있다는 언덕 근처에 우릴 내려 놓고 잘 놀다 오라며 들어가신다. 뭐가. 이상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대답하는 친구가 이야길 꺼리는건지 잠시 고민을 했지만 오늘 밤 신세까지져야 하니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어머니 말야. 아, 새어머니. 대수롭지 않게 녀석이 말했다.
다들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새어머니를 말할 때면 미안하다고 하더란다. 우리 엄마 아빠가 헤어져서 새로운 사람을 만났는데 왜 자기들이 미안한건지,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말 안했어. 요즘 세상에 이혼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길을 앞서 걷는다. 그리고 넌 미안하다고 하지 않네.
어머니라는 호칭이 다른 여자에게 옮겨가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평생토록 하나 뿐이었을 단어가 갑자기 둘이 되는 기분이란 아마 상상도 못할 거라고도 했다. 그래서 여전히 어색해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가끔 친 어머니를 만나러 가거든, 잊지 말고 좋아하던 음식 하나 정도는 기억해 두라는 말을 농이랍시고 던졌다.
기껏 피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버지는 멀리서 일을 한다 했다. 어느 일인지, 달에 한 번 쯤 얼굴을 비추는 그를 그리워할 줄은 몰랐다고도 했다. 생전 알지 못했던 여자와 한 집에 사는 일이 어색해 물 마시러 나가는 일도 참으며 방구석에 앉거나 누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정적이 흐르는 식탁에 앉는 일을 피하기 위해 배달음식점의 번호도 꽤나 외웠다 했다.
진즉 친해졌던 친구들도 방학엔 드문드문 올 줄 알았으나 태백은 역시 한참이나 먼 동네였다. 이젠 학교를 다니지 않는 나의 갑작스런 연락에 냉큼 집으로 오라고 한 것은 그 분위기 때문이었을거라 짐작했다. 어쩌면 그 터무니없이 긴 방학을 견디기 위해 할 일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차갑고 적막한 땅에서 곰처럼 겨울잠만 잘 수도 있었겠다며, 그리고 진짜 곰같이 생긴 그 녀석을 곰탱이라 불러보고도 싶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은 분명 차가웠을테지만, 몸은 뻘뻘 땀이 나 겉옷을 벗어던졌다. 풍차는 조용히 돌고, 아득했던 언덕께에 도착해보니 우린 흔한 물 한 병 없었다. 눈을 뭉쳐 씹으며 소리 하나 없이 목을 축였다. 어머니가 둘이 된 남자 곁에서 조용히 눈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