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키즈 존(No Kids Zone)
이제 늙어서 마음대로 놀지도 못 해.
클럽을 좋아하는 친구가 문득 그런 말을 던졌다. 클럽의 문 앞에서 박대를 당한 뒤 그냥 술이나 먹자 싶어 날 부른 참이었다. 나이 제한이 있다는 이야긴 쉽게 접할 수 있었으나 여태 가본 적은 없었기에 ‘벌써 그 정도 나이가 되었구나’ 여길 뿐, 내겐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별 것 아닌 문제였다. 살면서 당신은 그 정도로 늙었다는 감각을 다시 깨워주기에 좋은 것이 클럽, 담배, 술이라면 그 각자의 속성은 딱히 좋지 않은 것들인 게 아이러니였다.
우린 어려서도 마음대로 놀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마음대로 놀았으나 잘못한 것이 있으면 혼이 났다.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이 생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것처럼(사실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쉼 없이 탈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정작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큰 피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걸 인지하지 못한 나이에선 차마 뒷일을 생각 못하고 꽤 마음대로였다. 다행히 큰 사고를 친 적은 없지만 종종 들리는 뉴스에서는 그런 사고를 친 아이들이 보이기도 했다.
어느새 아이를 낳곤 때로 훈육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아이가 너무 어릴 때에는 어쩔 줄 모르던 모습을 내게도 보여 우스웠지만 이젠 제법 아빠의 모습이 있었다. 외식을 하던 날에 두 아이와 함께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더니 큰 아들 녀석이 아주 가관이었단다. 음식을 가지고 장난치는 거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 동생을 꼬집고 울리고 하는 일은 기본이어서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호되게 받은 채 집으로 돌아와 한참 고민을 했다고. 그다음 한 번, 집에 큰 아들만 두고 외식을 다녀오니 깔끔하게 고쳐졌다고 했다. 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간 덕에 그리 오랜 시간을 비우진 못했으나 돌아와 반성하고 있는 큰 아들의 손을 잡고 말해줬단다.
다른 사람들도 맛있는 걸 먹으러 왔는데 너에게 방해받고 싶진 않을 거야, 넌 시끄럽고 뛰어다니고 음식으로 장난을 치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다음에 함께 가서 맛있는 걸 먹을 수 있겠지?
나름대로 괜찮은 식당에 가서 다른 곳보다 높은 값의 메뉴들을 눈으로 훑으며 많은 고민을 했다. ‘나는 근사한 식사를 하고 싶다.’ 사치라고 생각될 수 있는 곳에 가면, 차라리 기분 좋은 기억을 남기고 오자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종업원의 미소를 기억에 새기고 물로 입을 헹구고, 향을 맡은 뒤 처음으로 혀에 닿는 맛에 집중하면 미식가는 아닐지언정 그런 흉내는 낼 수 있다는 걸. 비록 유모차가 들어오기 전까진 말이다.
말하지 못하는 갓난아이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바로 옆 의자까지 올라와 뛰노는 아이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했다. 나와 마주 앉아 있는 사람에게도 미안해지고, 목표했던 ‘근사한 식사’는 물 건너 간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에 결국 급하게 먹고 치웠다. 아이를 키우는 법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설명할 생각이 들진 않는다. 부모의 자격에 대하여 말하고 싶지도 않다. 아이에게 어른 수준의 교양을 바란다고 했을 때, 아주 글러먹었던 어린 시절을 갖지 않은 사람은 몇이나 될 것인가.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일부 아이의 예를 제외하고 나는 보통의 과거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된 걸까. 그렇게 우린 아이가 낯설어지는 것이 아닐까.
아이는 그럴 수 있어,
그런데 당신은 그러면 안 돼.
조용함을 원하고 휴식이 필요한 손님들의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 규정을 정했을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 가게가 결국 버티지 못한 것은 아닐는지. 감당이 안 될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또 그만큼의 고객을 잃으면서까지 아이를 금지하고 있다. ‘우리 아이는 그렇지 않다.’는 말에 함부로 기대를 걸 수 없다는 일이 지독하게 슬프다. 아이 키우기 힘들다며 하소연하는 사람들의 그 푸념을 들어줄 여유마저 없다는 건, 차고 넘치는 팍팍함 속에 차라리 탓하지도 못하게.
웹상에서 농담으로 돌아다니는 문장이 떠오른다. 물론 당신의 아이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모두의 공감을 받은 그 문장이 말하고자 하는 건 모든 걸 부모의 책임으로 돌리자는 게 아니라 다만, 보호자가 왜 보호자인지 알 필요가 있다는 것. 아이의 실수가 본인이 발생시킨 잘못이 아니지만, 자신의 책임으로라도 돌릴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 그리고 그건 앞으로 어느 누구의 보호자가 될 우리 스스로가 이제 보호받는 입장을 벗어났다는 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