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하 Sep 01. 2017

각자의 언어로 나눈 대화

예비군 동창회.


군복을 입은 껄렁함들이 모인다. 하나같이 메마른 표정들은 이제야 사회를 좀 겪어본 듯, 아는 얼굴을 찾아 간만에 웃는다. 각종 허세를 두르고 나타난 이도 서로 자주 봤는지 퉁명스레 어깨를 치는 이도 있다. 주소지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는 이들은 '향토 방위'라는 과한 단어 아래 모였다.


고작 몇 명 정도가 아는 체를 하며 근황을 물어왔으나 짧게 답할 뿐 내세울 게 없는 나는 잠자코 있다. 밥 한 번 먹자. 언제? 의례적인 질문을 의례적으로 받지 않는 내게 당황한 치들이 물러섰다. 동창들은 여전히 날 어려워했고 예의상 같은 질문을 돌려주며 근황을 궁금해 할 법했으나 하지 않았다. 곧 이야깃거리가 떨어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찾거나 휴대폰으로 몰래 게임을 할 뿐이었다. 이런 반 강제적인 동창회에 기분이 씁쓸할 무렵, 북적한 사람 사이로 그가 오랜만의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는 입 주위에 늘 버짐이 피었다. 옷에서 섬유유연제 향이 짙었던 기억을 보면 결코 더럽진 않았다. 학창시절 그의 시달림은 남다르게 있었는데 말을 하지 않는 이유 탓이었다. 한 번 말 좀 해보라. 그게 학급의 명령이었다. 선생까지 합세하여 듣고자 하던 그의 목소리와 대답은 여태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다. 그렇게 해가 지날수록 아이들은 과격해졌다.


많은 이들이 풀에 지쳐 포기했고 그 중 꾸준하던 아이들은 때로 주먹을 휘둘렀다. 가끔은 학교 앞 구멍가게에 드나들며 타일러 보기도 했지만 소용 없었다. 학교의 특성 상, 종종 벌어지는 난감한 상황에 대해서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답답한 놈들이 비아냥거리며 욕을 하거나 때릴 때에도 조용했으니 오죽하랴. 그 즈음 그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사실 부모의 이혼은 대수롭지 않은 일임에도 어떤 흉이나 모자람이 되는 듯 빨리도 퍼졌다.



그런 그와 다녔던 때가 있다. 하교 후에 군것질을 하는 식이었는데 말을 하지 않으니 혼자 떠들었다. 지지 않을 만큼 말수가 적었던 내가 혼자 떠들 정도였다. 조용히 먹고 가끔 하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었다. 우스운 이야기에 더러 미소도 볼 수 있었지만 역시 소리는 들을 수 없던 날들이었다. 잘 가라는 인사를 묵묵히 거둬가기만 하던 그.




나랑 맞짱 한 번 뜰래?

부끄러움과 함께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난다. 대사는 후줄근했고 유치했다. 말 없고 왜소한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치기 어린 중학교 시절에 머물러 왕 노릇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녀석 하나가 말을 뱉고 있었다. 곧장 편을 들 수도 없이 애매한 분위기 탓에 조용히 그 줄에 앉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방적인 대화가 끝났다.


뒤에 앉은 날 알아본 녀석은 말을 걸었다. 소식 들었어 애들 중에 성공해서 가장 멋지게 사는 건 너더라. 글쎄. 진짜야 내가 얼마 전에 회사 사진 동호회에서 이야기하니까 다들 찍 소리도 못하더라고. 친한 척에 몸서리를 친다. 나는 고작 기억도 나지 않던 사람의 자랑거리로 오르내리고 있었나.


다른 사람들의 근황을 모르니 속히 대답하기 어려웠지만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나의 소식을 전한 사람은 누구인가. 어디서 어떻게 성공을 했던가. 내가 이 녀석과 대화를 하던 사이였었나. 역시 잘 될 줄 알았어. 이야길 나누던 적도 없는 사람에게 듣는 평가가 메스껍다. 그러나 오해가 생겨도 풀려고 하지 않는다. 참 고리타분한 마음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군화를 신는데 그가 옆에 있다. 잘 지냈어? 처음으로 들은 그의 목소리는 상상과 달랐고 그 괴리에 당황하여 멍청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그러는 너는. 어쩐지 어색하지 않은 그의 눈빛엔 전에 없던 당당함이 깃들었다고 느꼈다. 만난 사람 중 처음으로 물어버린 근황에도 줄줄 설명하지 않는 모습에 그가 그대로라고 느낀 것이 다행이었다.


말을 않던 이유는 묻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마음에 입은 상처가 경미한 찰과상인 경우는 없다. 대부분의 상처가 제때 치료하지 않아 염증이 되기 때문에. 과거를 꺼내지 않고, 미래를 꺼내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편한 사람은 오랜만이구나. 말을 하지 않던 그와 자주 대화를 한 것 처럼 굴었다. 분명 그에게도 아팠을 학창시절은 '왕년의'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만들어져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대화에서 결코 필요없는 것들이었기에.


이동하는 버스에 앉아 가져온 책을 꺼내니 그 행동은 요즘 세상에 어떤 허세로 받아들여졌나보다. 건너편에 손가락질 하는 몇 명과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책을 펼쳐 글을 읽기 시작하자 내 옆자리의 그는 곧장 잠잠해졌다. 원래 잠잠한 사람이었지만 이제 '과묵한'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그가 역시 맘에 든다.



훈련이 끝난 뒤,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자 이제 목소리를 사용하는 그는 다시 침묵했다. 나를 보며 가만 끄덕이는 모습이 다시 나의 인사를 거둬가는 듯 했다. 그러나 눈은 분명 내게 인사하고 있었다. 소리의 언어가 없던 그에게 침묵의 시간은 표현의 확장이었을텐데. 우린 여태까지 각자의 언어로 대화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긴 학창시절을 함께 다니며 그를 몰라도 한참 몰랐던 건 나였다.


그의 입을 가만 살펴보니 버짐은 사라져 있었다.
우린 마치 교복처럼 모두 같은 무늬의 군복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지점의 연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