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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Sep 30. 2017

라디오 스타

새벽녘의 글과 말.


나고 자란 세대가 결코 라디오 세대는 아니다. 가끔 드라마에서 청취자에게 깊은 위로를 건네는 DJ를 보며 저 시대의 사람들은 라디오가 얼마나 큰 삶의 일부였을까 생각하곤 했다. 주파수를 맞추고 엽서를 쓰는 일이 소중해 보였다. 집중하여 마음을 쓰는 방법을 배운 사람들은 어딘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고. 쓰던 글이 몇 번 실린 잡지를 보았다며 온 메일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심야 라디오 피디---입니다.'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통화 가능하세요? 글과 말이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 일은 그 이후였다. 글을 쓰는 나를 말로 설득했다.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나는 불리했다. 그렇게 원고는 매일 같이 수정을 거치고, 글의 무게와 말의 무게가 어느 정도로 다른가 뼈저리도록 느꼈다. 그나마 그 무게를 제법 알던 터라 문제가 많진 않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괜찮은 지점을 얼추 맞출 수는 있었으나 원고라는 건 그 무게를 정확히 맞추는 일이었다. 나는 어설펐고 가끔 아찔했다.


변명이지만 많이 바빴다. 여름은 과일이 영그는 계절이었고 우리 집은 농사를 일구는 집안이었으니까. 글을 소홀하게 느끼진 않았으나 마감이 있는 일은 힘에 부쳤다. 쓰여지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시간을 견디기 어려웠다. 못 하겠다고 말해야지, 그 포기는 일주일 만에 이루어져 결코 늦지 않았다 생각했다. 라디오 원고를 쓰며 고민한 밤이 마음 한편에 조촐한 추억이라 남을 일이었다.


아무래도 솔직하지 못한 글을
갈무리하는 일이 어렵겠습니다


새벽의 사람들은 예민해요.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려 너무 힘이 들어갈 필요는 없지요. 원고 쓰는 게 많이 어렵나요? 마음의 여유가 한편도 없으니 먼저 선수를 치려던 나의 완곡한 거절 의사는 곧바로 울린 전화에 완곡하게 거절당했다. 뒤늦은 농번기는 가혹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열 두시에 잠드는 그 사이. 잠들 시간에 흐르는 방송을 채우려 잠을 쪼개야 했다.



새로 지었다던 사옥은 거대했다. 올라오면 연락해요. 문자에 남겨진 약속시간을 가만히 바라보다 목소리를 가다듬어봤다. 어딘가 모를 곳에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네는 일은 처음이었으니까. 내 목소리가 괜찮은지, 톤은 어떤지. 들어보고 싶어 혼자 읊은 첫 문장을 다시 재생해본다. '심야 라디오 디제이를 맡은 --입니다.'


차가운 담벼락 사이를 뚫고 들어가 방문 출입증을 받고서 이름을 적는다. 라디오 피디 면접으로 오셨나요. 아뇨, 심야 라디오 녹음하러 왔습니다. 라디오 피디가 되려는 사람은 제법 많았다. 저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예상 질문을 중얼거리는 사람들의 라디오가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다소 무례했지만 왜인지 꼭 그런 기분이었다. 정장을 입은 사내가 얼굴을 흘깃 보더니 신상 정보를 옮겨 적고 말한다. 11층으로 가세요.


종종 티브이에서 봤던, 방송이 막 끝난 남자를 스쳐 지나가고 나와 만나기로 했던 담당 피디가 그 방으로 날 안내했다. 강연은 해 본 적이 있나요. 전혀요. 그럼 그 서툰 모습대로 가면 좋겠네요. 대답 하나로 사람을 이리도 편안하게 할 수 있구나. 문을 열고 나간 방송인의 체온이 남았는지 의자는 따스했다. 소리가 차단된 공간이란 사람을 가라앉게 만들어 금세 차분해진다. 짧게 나눴던 대화를 다시 들려주는 피디의 손놀림에 난 나의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들으며 혼자 했던 녹음이 전혀 쓸모가 없었구나 했다.




다시 갈게요.


방금 원고를 넘기는 그 종이 소리는 좋았어요. 이 말은 나의 목소리가 좋지 않다는 뜻인가. 표정이 드러났던지 피디는 말없이 문을 열고 잠시 다녀오겠다며 한참 후 음료수가 든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쉬고 합시다. 좀 마셔요 이거나 들으면서. 피디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그 시간, 막히던 부분을 다시 읽어보는 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홀로 남아있던 시간에 방송실의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던 걸 나는 몰랐다.


훨씬 좋네요.




이제 좀 작가님을 알 것 같아요. 제가 작가라뇨 설마요. 녹음을 마치고 나오며 그는 손을 내밀었다. 이 새벽의 심야 라디오 시간은 출근시간이나 주말의 황금시간대처럼 대단한 시간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청취자들은 기꺼이 당신에게 두 시간을 내어줄 겁니다. 새벽 세 시에 라디오를 켜는 사람은 각자의 사연이 있지요. 그 헛헛한 마음에 굳이 몸을 일으켜 주파수를 맞춘다는 일은 엄청납니다. 그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전하고 싶던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 악수와 함께 나눈 말에 무게를 알고 보니 한없이 보잘것없는 나의 이야기는 그 시간의 마음들을 견딜 수 없을 터였다.


방송이 되던 밤, 수없는 글이 올라왔다. 전국에서 깨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올라왔다. 새벽들은 온통 상처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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