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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Oct 18. 2017

묵은 때를 벗기며

시끄럽고, 때나 밀어.


뜨거운 몸에 찬 바나나우유를 들이켜는 느낌이 오래되었다. 때 밀러 가자. 탕에 몸을 담그러 가자는 말을 친구는 꽤 오래 피했다. 동네에 사는 친구의 하루가 워낙 바빠 다음으로 미루길 몇 번, 서로의 여가에 없는 상대가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큰 거사를 치르듯 옷가지 몇 개를 챙겨 나선다. 오래된 익숙함. 운전을 모르는 나는 차를 끌고 오는 친구 대신 샴푸나 로션 따위를 챙기는 게 몫이었다. 얼굴을 본지 오래되었어도 인사는 늘 싱거웠다. 헤드라이트가 반사된 어두운 빛으로 친구의 얼굴을 간간히 살펴보며 차에 몸을 싣는다. 우리의 목욕은 늘 밤이었다.



어머니는 여자가 젖은 머리로 거리에 나설 수 있는 때가 목욕 바구니를 들었을 때라고 했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여즉 알지 못하지만 안 될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기도 했다. 비록 그 상황이 감기에 걸리기 좋은 때라는 것 밖에 알아내지 못했으나 종종 길에서 마주하는 젊은 여자들의 등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은 가여웠다. 말리고 나오면 되지 않았을까. 여탕의 헤어드라이어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더라. 그것 역시 뒤늦게 알게 된 일이다.


바구니를 메고 걸어야 할 것 같은 밤이었다. 입김이 나오도록 시린 바람을 피해 자주 가던 목욕탕 앞에 서니 운영시간이 줄었다.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라 한 시간을 줄여도 할 말이 없지만, 그게 딴엔 못내 서운했다. 문 닫는 시간이 일러져 제대로 씻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새로 생겼다던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 해야 할 일이 늘 산더미라는 친구는 살이 제법 빠졌다. 여름을 버티기 어려웠을 군살들은 찌지 않는 녀석의 체질과 더불어 앙상한 뼈만 남겼다. 벗은 몸이 대신 대답한 것 같아 그냥 스스로 말을 이어 붙였다. 일단 씻고 나가서 뭐라도 먹자. 아무래도 탕은 미지근했다.


삶이 꽤나 막막해.


인생살이가 부쩍 버겁게 느껴지는 나의 말이었다. 결국 돈벌이가 어쩜 이리 힘드냐는 한탄으로 이어지며 복권이나 되었으면,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안 어울리게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자주 세상을 누비는 게 부러웠던 탓인지 아니면 진심이었는지 친구는 말했다. 세상 쉽게 살던 놈이 왜 갑자기 어렵게 살려고 그래. 시끄럽고 때나 밀어. 피로가 풀리지 않는 온도의 탕에서 미적거리다가 나온 것이 우습게도 때는 밀렸다. 때를 밀었던 일이 한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땀이 난다 느껴질 정도로 힘이 들다니 난 아마도 꽤 더러운 모양이었다.




스스로 변했다는 말을 입에 올리기엔 조금 우습지 않은가 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친구의 등을 밀며 그런 소리를 했다. 난 참 많이 변한 것 같은데 말이야. 몇몇 사람들도 그런 말을 하고. 그런데 다 소용없이 무너지는 순간이 닥치면 어김없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 있지. 이런 걸 보면 변한 게 아니라 연기를 잘 하게 된 걸지도 몰라. 그는 아무 말이 없다가 내 등을 밀 순서에 돌아 앉으며 말했다. 그것도 연습이야. 살이 아프게 밀린 자리는 쓰라렸다.


야! 추운데 쫄면은 무슨.


밤에 연 식당이라곤 이런저런 메뉴가 빼곡한 김밥천국뿐이었다. 내 말에 다른 메뉴를 생각지 않은 듯 떨떠름해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그랬다. 먹고 싶은 거 먹어. 참치김밥이 너무 먹고 싶었다며 한 줄을 시키곤 다시 쫄면을 고민하기에 왜 그러냐 했더니, 그는. 괜히 한 말에 정말 그런 것 같은 기분을 받을 때가 있지 않으냐며 지금이 꼭 그렇다 했다. 나는 정말 괜스러운 말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처음 마음가짐대로 우유를 마셔도 될 일인데 우린 술이 고팠다. 그런 마음과 달리 술을 잘하지 못하는 우리는 작은 맥주 하나씩을 집어 들었다. 구석에 놓인 복권이 눈에 들어 빤히 보고 있자니 녀석은 한 장 사라고 했다. 네가 말하던 그 일확천금 아니냐. 싸구려 플라스틱 가판대에 놓인 일확천금은 볼품없이 놓인 종이였을 뿐이었다. 맥주와 과자를 몇 개 결제한 카드를 도로 내밀어 복권을 사려하니 점원이 말했다. 카드로는 못 사요. 현금이 없어 복권을 살 수 없는 상황에 친구 녀석은 대신 천 원을 내밀었다.


시내를 빠져나오고 동네 어귀로 돌아와 적당히 걸터앉아 마시니 취기는 금세 올랐다. 복권 당첨되면 어떻게 할 거냐. 글쎄 네가 사준 거니까 너 줘야 하지 않겠냐. 네가 고른 건데 왜 내가 가져. 그럼 반 씩 가져. 그래서 무얼 할 거냐는 말에 아마 조금 더 여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을까 했다. 묻던 녀석의 대답이 내심 궁금해 잠자코 있자니 그가 말한다. 나는 집안의 빚부터 갚을 거야.


그 말을 듣고도 나는 맥주나 꿀꺽 삼킬 일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우리 다음엔 꼭 뜨거운 탕이 있는 곳으로 가자. 당첨된 큰 금액으로 친구의 짐을 모두 지워주리라. 그리고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신경 쓰리라. 그런 말을 냉큼 하지 못했다. 없는 재산으로도 베풀지 않는 나의 심보에 화가 났다. 아마 때가 덜 밀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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