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나는 토라졌던거야.
그는 남자였고 여자였다. 그는 회사원이었고 비보이였으며 때론 여행자였고 요리사였다. 나이가 많기도 적기도 했고, 그깟 나이야 아무 상관이 없기도 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돈을 벌며 생활하고 부모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키가 작으며 컸고 발 사이즈가 작아 때로 유아용 신발을 신을 수도 있었으며, 큰 발에 걸맞는 신이 없어 따로 주문을 하기도 해야 했다. 그런 그에겐 어떤 호칭도 없었다.
숨을 들이키면 꽃가루가 가득 밀려와 들숨조차 자유롭지 못하던 봄날. 술을 마시기도, 아예 못하기도 했던 그는 마실 것을 들고 나무 아래 앉아있었다. 세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하고 싶었는지 아님 이야기를 들어줄 법한 사람이 나였는지, 두서없이 시작된 이야기는 액션물도 호러물도 아니고 다 들어보니 로맨스였더라. 그리고 언제나 남의 사랑이야기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지.
아무래도 좋아서 들어주겠노라 생각했는데 그 때 나의 시간은 충분했던가. 부족할 건 또 뭐람. 그래 그 달콤하고 쌉싸름한 이야기가 피어나기엔 역시 술이 좋더라. 듣겠다는 태도를 취한 나를 앞에 두고 그는 정치와 시대의 흐름이니, 아프리카 대초원에서 벌어지는 무분별한 밀렵. 페미니즘과 가족의 제사에서 남자들이 빠진 부엌에 대해, 화장품의 터무니없는 가격과 군대 선임이 제대했다는 이야기. 커피를 내리는 방법 또는 애인이 사 준 립스틱의 색이 마음에 썩 들지 않는다는 걸 여러가지 목소리로 널어놓았다.
그는 앞서 말했던, 지구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가겠다는 목표를 배반하듯 말했다. 나는 면도를 하며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일이 그렇게 좋아. 수도꼭지를 잠그는 그녀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물을 아껴야지. 그래 물론 나도 알아. 하지만 이 최소한의 배덕감을 갖는 일이 나는 좋은 걸. 어쩌면 누군가와 사랑하는 일이 한없이 상냥하게 모든 것을 헤아리던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을 알게 되는 일은 아닐까 싶었다고.
꼭 약속시간에 늦어 애가 탈 때면 너는 애교를 부렸다. 찢어버린 영화 티켓을 모아 바꾸었더라면 나를 만나기 전부터 깨져있던 너의 휴대폰 액정을 바꿀 수도 있었을테지. 유명한 맛집의 차례가 다가와 발을 동동 구르다 순서를 빼앗기고, 그 추운 겨울. 너의 손보다 발보다 한참 시렸던 건 원망하는 눈빛이었지. 차가 막힌 걸 알았어도 할 수 없는 서운함과 우린 다투어야 했어.
가방에 달아 준 흰 인형은 때가 많이 탔겠지. 그렇게 싫어하던 너의 표정에 괜히 심술이 나서 꼭 달고 다니라고 했었는데. 나중에는 다른 가방을 들게 되었을 때도 옮겨간 그 인형을 보고 속으로 얼마나 미소를 지었을까. 그러나 당신이 사주었던 속옷은 어디다 처박아두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어차피 와이어가 늘어나 버려야 할거야. 매일 입으라던 테니스 스커트가 얼마나 싫었는지도 너는 모를거야. 신경써야 할 게 많거든.
그는 그렇게 말을 멈추고 다시 맥주였는지 탄산음료였는지 모를 마실 것을 들이켰다.
사랑은 변해. 어떤 나이가 지나면 말야.
그는 짝사랑을 다시 시작했다.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외에 없었으니까. 여러 번 마음이 이사를 다니길 지나 스스로의 찌질함에 질려버려 관뒀다고 했다. 잘 익은 과실 같던 달콤한 감정이 찾아오면 막지는 않겠지. 하지만 특별히 당신에게 달걀을 하나 더 얹어주지는 않을거야. 당신이 썼던 나의 립글로즈에 의미를 갖지 않을거야. 그렇게 되면 술에 취한 채로 잠들기 전 선크림을 깨끗하게 지울 때까지 신경이 쓰이고 눈썹을 정리해주던 일까지 죄다 사랑이어서. 난 너에게 고작이지만 더 웃어줄 수나 있을까. 그러나 그게 사랑이었던 나이는 이미 지나버렸다고 했다. 사랑은 변해, 어떤 나이가 지나면.
눈치는 있었대. 끼어드는 일이 끼어드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대. 못 참고 계단을 더 오를까 말까 그 사이를 고민도 했다지 아마. 밀려오는 널 참지 못 했지만 꾸준히 버텼대. 쌓인 것이 많으면 쏟아져 버릴 일도 많다는 걸 견디지 못해서 이유를 만들어야만 했다고. 그는 속이 상하면 뒤돌아 등을 보이는 일이 최선이었다고.
그는 그를 사랑했다. 당신이 나의 부모님을 마음에 들어했으면 좋겠노라, 너른 벌판에 작은 집을 지어 살자, 달콤한 미래도 이야기 했었나보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조용조용한 성격의 그가 그렇게 울었다면, 날리는 꽃가루도 아랑곳 없이 한숨을 깊게 뱉고 다시 공기로 폐를 채우길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걸 보면. 그를 분명 사랑했다. 그는 숨을 채우며 그의 얇은 지갑에 움츠러든 어깨가 싫어 몰래 넣었던 지폐 몇 장을 떠올렸다.
언젠가 너에게 다정함이었고 나에게 역시 다정함이었을 이야기를 가득 먹고 그가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술에 취해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율동같던 몸짓과 어설픈 짝사랑과 꼭 이렇게 종이를 많이 써야 했나 싶은, 사랑에 관한 책을 들고서 나무소리가 별 사이로 들리는 길을 걸었다.
너와 내가 밤하늘에 집중하는 이유는 몇십만년 전 어느 순간에 사라졌을지 모를 별똥별을 기억할 사람들이 되기 위해, 마치 사랑처럼. 소곤소곤 아끼던 비밀이야기가 재미없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이야기를 마친 그는 그 누구도 아니었으며, 다만 사랑을 하는 우리였다.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