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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an 08. 2018

어둠으로부터 데려온 용기

영화 <다키스트 아워>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같은 소재의 영화는 늘 비교의 대상이 된다. 대개 앞서 나온 영화로 경험을 취한 대중은 뒤이어 나온 작품에 큰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다키스트 아워>는 이 속설을 단지 작품성으로 찍어 누른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덩케르크 해안의 비참한 현장으로 우릴 잠시 데려갔다면, 게리 올드만이 연기한 처칠은 덩케르크에 고립된 공포까지 오롯이 짊어진다. 먼저 개봉한 <덩케르크>가 속편이 되는 아주 기이한 경험이다.





2차 세계대전 중반, 덩케르크 해안에는 연합군 30만 명 이상이 고립된다. 이름조차 모르던 프랑스 해안의 이름은 한 번 겪어보았다고 익숙한 체를 한다. 히틀러는 전차부대로 연합군을 몰아내고 서유럽을 장악한다. 해안까지 밀린 연합군은 탈출할 방도가 없어 기다릴 뿐 속수무책이다. 그 시각 영국 정치계가 긴박하게 움직인다. 새로운 총리로 윈스턴 처칠이 임명된다. 


실제로 처칠의 성격은 괴팍하고 괴짜인 구석이 많았다고 한다. 자신이 이끄는 해군이 독일군에게 패배했던 경력 탓에 정계와 왕가 모두로부터 신임을 잃은 그는 스스로가 환대받지 못하는 총리임을 잘 알고 있다. 사기를 증진하기 위한 연설이 죄다 거짓말이라는 정치인들의 공격이나 만남을 꺼리는 국왕의 태도에도 아랑곳없이 유쾌하다. 처칠이 구사하는 블랙코미디는 냉소적이긴 해도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시가를 줄줄이 물고 온갖 술을 끊임없이 먹는 일이 거북하지만 사치스러운 생활과 비견되는 직설적 화법은 되려 인간적 분위기를 풍긴다.


실제로 이 사진을 찍힐 때, 물고 있던 시가를 빼앗겨 언짢아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이유

낙관을 넘어 안일한 연설과 달리 상황은 좋지 않다. 덩케르크에 고립된 30만의 병력을 구하기 위해 옆 도시 칼레에 주둔한 4천 명의 병력을 희생하는 장면에서 깊은 고뇌에 빠지고 개인 소유의 소규모 선박으로 구출 작전을 준비하는 등 애쓰지만, 부족한 시간은 하염없이 흐른다. 처칠은 스스로가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정적들을 대거 기용했다. 그러나 정적들은 히틀러에게 협정을 제안하자고 지속적으로 처칠을 괴롭힌다.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쏟는 설득에 잠시 흔들리긴 해도 처칠은 자신의 정의를 밀고 나간다. 고립된 병사들의 목숨, 그리고 더 나아가 영국 본토에 있는 국민들의 안위를 짊어지고도 책임질 수 있느냐는 물음에 단호하다. 모든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 그가 총리의 자리에 앉은 이유니까.



처칠은 내내 어둠 속에 있다

영화 속 처칠은 항상 빛이 들어오는 앵글 반대편 그림자에 있다. 출입문에 있는 작은 창이나 화장실, 엘리베이터에 탄 장면이 관객에게 주는 압박은 거대하다. 여유로운 듯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화장실에 주저앉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로 전화하는 장면은 인상 깊다. 자존심을 내버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처칠은 가까스로 품위를 잃지 않지만 엄습하는 공포를 견뎌내는 일만으로도 벅차 보인다. 


처칠은 마지막 연설 전에 사라진다. 자신을 둘러싼 히틀러와 나치, 정치인들, 심지어 자신이 전선으로 내몰고 있는 병사들까지. 자신의 편이 없다고 느낄 그는 주변이 온통 적일 것이다. 영화의 서스펜스가 그늘져 있는 처칠로 대변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의 마음은 잿빛 투성이일 테니.



달변을 전쟁에 끌어들였군

독일을 전쟁의 움직임으로 끌어들인 것은 히틀러의 웅변이었다. 유태인을 적으로 규정한 인종청소와 학살의 광기는 세 치 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히틀러가 말을 얼마나 잘했는지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맘이 들게 했는가 의문이어도, 처칠 역시 말의 힘을 믿었다.


그의 연설 실력이 역사상 가장 대단하다 단정할 수 없지만 그 순간 처칠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켰다. 직설적이고 단호한 말투로 가슴 깊숙한 곳의 어떤 지점을 건드리는 단어의 사용은 평소에도 수없이 고찰하는 성격 탓이 아닐까. 의회에서 서로 으르렁대기만 하던 정적들 역시 인정해야 했던 연설 후 대사가 관객의 마음을 대변한다. 달변가 히틀러에게 맞설 수 있던 달변은 그랬다.




냉정하게 보자면 그의 선택은 성공했기에 회자될 수 있다. 실패한 작전에 대해 역사는 관용을 베풀지 않으니까. 허황된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역사를 미화하지 않는 이 영화는 윈스턴 처칠 개인의 역사를 대변한다. 그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은 영화 내내 그를 따라다니며 보는 이마저 그 무게에 질식할 것만 같다. 그러나 그건 책임과 힘의 무게에 대한 완벽한 경험이 아닐까.



개인의 인간적인 면을 보였다 하여 결코 그가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의 연설문이나 전보를 타자기로 쳐 주는 레이톤 양이 궁금해하는 것들을 처칠은 손수 알려준다. 적어도 그에게 기밀은 없다. 신뢰에서 비롯된 합리적 낙관은 위험하지만 처칠의 힘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인간적이나 옳은 자세인가 하는 물음에는 답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그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 연설 전, 사라진 처칠이 처음으로 지하철을 탄다. 많은 시민들이 그를 알아보고 예우를 차리지만 더없이 친근한 처칠의 모습에 모두는 긴장을 푼다.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을 그가 직접 시민에게 의견을 묻는 건 권위를 모두 내려놓은 한 인간의 상이다. 그렇게 그는 어두운 지하철에서 밝은 출구로 나온다. 연설로 터트릴 수 있을 자신과 국민에 대한 믿음. 고작 지하철 한 칸의 용기를 얻은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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