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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Mar 19. 2018

황홀한 날씨의 저주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국발 영화로 학습된 플로리다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태양과 멋진 해안. 그런 곳에 지어진 디즈니랜드라니 얼마나 환상적인가.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주변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는 디즈니랜드의 계획을 가리키기도 했다. 영화는 그 명칭을 따 자본주의에게 밀려난 홈리스들의 삶을 조명했다. 반어적인 포스터로 만들어진 포장지를 풀고 펼쳐진 영화를 아카데미는 놓친 것인가, 외면한 것인가. 




Take some home 

디즈니랜드 건너편의 모텔엔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한부모인 핼리와 딸 무니 역시 매주 세를 내며 살고 있다. 도매상에 가서 떼온 향수를 호객하여 팔고, 친구에게 얻은 와플로 끼니를 때우고. 결국 힘에 부친 핼리가 몸을 파는 지경이 되기까지 환상의 나라 곁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로 근근이 산다.  


무니와 친구들은 매일 같이 크고 작은 소동을 벌인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친구들은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하며 폐가에 숨어들어 불장난을 하기도 한다. 문제가 되기 전까지 아슬아슬하게 사는 모습이 불안하게 영화는 흘러간다. 플로리다의 황홀한 날씨는 차라리 저주에 가깝다. 



마법의 성 

모텔 ‘매직 캐슬’의 관리인 바비는 사고뭉치 아이들로 인해 소동이 벌어질 때면 찾아가 쫓아낸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야박하고 또 다르게 보면 친절한 바비의 의중은 영화 전반에 걸쳐져 알쏭달쏭하다. 자기가 피해를 보지 않으면 괜찮다는 방관자의 위치보다는 조금 더 인간미 있는 방향으로 균형이 쏠린 듯이. 


젖가슴을 내밀고 선탠 하는 투숙객을 제지하러 갈 때도 신나서 떠드는 아이들이 있다. 그렇게 매일 지속되는 아이들의 모험에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때로 도움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인사도 하지 않으면서 담배를 얻을 때나 인사하는 그가 입구를 막고 있는 새에게 인사할 때, 우리는 일렁이는 감정을 받는다. 


바비는 시간이 흘러 투숙객에게 인사도 하게 되고 행여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길까 낯선 사람의 접근을 막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핼리의 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서 충실하다. 무니를 데려가려는 아동국을 돕지도 않지만 도망치는 무니를 막지도 않는 그에게 숙박객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아마도 그가 지키는 건 하나하나 마법이 사라져 가는 성은 아닐까. 



이런 게 인생이지 

무니는 시작부터 친구 딕키를 잃는다. 새 차에 침 뱉기를 하다가 잡힌 딕키는 곧바로 외출 금지를 당하고 얼마 후 떠나게 되며 장난감까지 잃는다. 전부 새 걸로 사 준다 말하며 다른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아빠의 모습을 보곤 침울하다. 이 장면은 핼리가 디즈니랜드 팔찌를 훔쳐 몰래 파는 장면, 또 건넛 숙소에서 몇 달러의 차이로 과격한 실랑이 하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세상의 기준에서 버티기에 동심이란 너무나 잘못된 것이 많고 지키기엔 돈이 많이 든다. 


영화 중반부에서는 어른끼리의 마찰로 인해 친구 스쿠티마저 잃는다. 폐가에 불을 지른 게 아이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도를 넘은 장난을 경계한 엄마가 스쿠티를 무니와 놀지 못하게 한다. 점점 분위기는 현실이 환상을 조여 오는 모양새로 흐른다. 


재미만 추구하는 모녀의 삶에 끝이 다가오고 무니와 핼리가 마침내 떨어지게 될 때, 핼리는 절규한다. '나보고 내 딸을 뺏어가는 걸 도우라고?’ 마지막 식사를 할 때 마냥 행복한 무니와 굳은 표정의 핼리. 지독한 욕설을 뱉으며 위악으로 버틸 수밖에 없는 둘의 똑같은 생활을 보면 다른 건 고작 나이 하나뿐이다. 






사람들이 각자 지닌 삶의 형태, 미묘하게 다른 한 채의 공간에서 누가 잘못했다는 비난은 옳지 않다. 영화에서 핼리는 때를 놓친 순수함의 현신으로 역할을 다 했다. 엄마로서의 역할을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가진 삶의 방식에서 죄는 오직 세상의 몫일뿐이다. 디즈니랜드의 값비싸고 고귀한 꿈 앞에 비틀대다 매직 캐슬이라는 싸구려 꿈으로 향할 수밖에 없던 핼리와 무니를 보자. 어른과 아이로 보지 않고 같은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은 오직 모텔 매니저 바비뿐이 아니었을까. 


언제나 막힘없이 말하던 무니가 어떤 말을 할 줄 모르겠다며 울 때 단짝 젠시는 무니의 손을 잡고 달린다. 우리가 바라 온 무지개는 더럽게 비싼 것이었다. 이 영화의 논조대로라면 아카데미 역시 이 영화를 외면하는 편이 맞다. 그러나 쓰러지며 자라는 것까지 빼앗으면 결코 안 될 일이다. 다행히 영화를 본 우리에게도 내밀 손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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