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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May 31. 2018

안개의 기분

영화 <버닝>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분명 주연배우를 고르는 것에 애를 먹었을 것이다. <버닝>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내용과 실제 배우 사이의 괴리가 곧이 곧대로 느껴지면 안 될 말이니까. 그러나 대중은 이창동의 이야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나 보다. 최근 일어난 일련의 일들 중, 작중 해미 역을 맡은 전종서의 공항 출국 태도가 논란이 되었는데 <버닝>을 통해 알게 된 배우인 만큼, 영화를 보았다면 사람들이 그녀의 태도에 관해 왈가왈부해선 안 된다. 조금이라도 성공한 듯 보이는 자의 발목을 잡아 끌어내리려는 모습은 어딘지 해미를 창녀라 욕하던 종수와 엇비슷하다. 이창동 감독은 <버닝>으로 청춘이라 불리는 세대의 기저에 깔려있는 암울한 분위기를 잘 짚어냈다.




물건 배달 알바를 하는 종수는 우연히 소꿉친구 해미를 만난다.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올 동안 고양이를 맡아달라는 해미의 부탁을 들어준다. 시간이 흘러 해미는 의문의 남자 벤과 돌아온다. 그는 어쩐지 수상하다.



개츠비와 뱁새


영화의 후기 중, '악의 없는 개츠비들이 다른 청춘들에게 끼치는 영향'이라는 평을 보았다. 엄청난 집과 스포츠카를 끄는 양반이 소개한 식당의 허름함은 시작부터 남다른 박탈감을 선사한다. 삶의 질을 막론하고 어디든 다닐 권리야 누구에게나 있는 자유지만 종수는 자신에게 ‘맞춰주는’ 거북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벤의 집을 보고 개츠비가 너무 많다며 중얼거리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 이쯤 되면 아프리카 여행을 떠난 벤의 심정이 궁금해진다.


해미는 벤을 비롯한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여행을 다녀온 시간을 이야기하며 본인이 얻은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비웃음 당하는 기분을 감지하는 종수, 애완견과 해미를 함께 잡는 카메라 앵글은 메스껍다. 지루한 듯 하품하는 벤을 보며 우리는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인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완전히 다른 그들의 세상을 따라가기에 종수는 가랑이가 찢어질 듯 위태롭다.



재미와 진실


여행을 떠나기 전, 해미는 종수에게 팬터마임을 보이며 의미심장한 대사를 뱉는다. 귤이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거야. 멋진 대사라고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깊은 사유가 이루어진 철학과는 거리가 멀다.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는 작은 방의 햇볕 따위가 행복이라면 차라리 잊고 지내는 편이 행복의 가치로 훌륭하다는 말과 같이, 결여된 삶에 적응해버리는 인간은 어쩌면 햇볕도 꿈꾸고 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패배주의에 가깝다. 요즘 세상에 흔한 정신승리처럼.


한편, 재미없으면 하지 않는다는 벤에게 아프리카는 어땠을지 뻔하다. 밤낮으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이렇듯 삶의 의미를 찾는 해미의 여행과 무게가 다를 터. 한낱 유희로 하루를 일삼는 벤이 종수를 가르치려는 태도는 일관되게 ‘꼰대’스럽다. 종수더러 너무 진지하다고 말하는 것은 벤이 스스로 누리는 생활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자백하는 꼴이기도 하다. 



불과 물


해미와 종수가 태우는 보통 담배와 다르게 벤은 ‘떨’이라 불리는 마리화나를 태운다. 곁에 있으니 또 그걸 함께 태우기도 한다. 벤이 누리는 모든 것들은 가까운 해미에게 반사작용을, 거리가 있는 종수에게도 미비하게나마 영향이 간다. 벤은 두 달 간격으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했다. 아주 별 것도 아닌 듯이 하는 그의 말에 종수는 매일같이 불안에 떨며 낡은 곳들을 살핀다. 벤의 시시콜콜한 재미는 종수에게 거대한 사건이라 받아들이는 덩치가 사뭇 다른 것.


이 모든 행위가 불법적인 행동이라서 경찰에게 걸리게 되더라도 벤은 별 악영향이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부의 지표가 사회적 신뢰를 결정하는 척도로 작용한다는 건 무서운 암시다. 사회 법망보다 위에 돈이 있다는 건. 영화가 진행되는 시종일관 땀에 젖고 똥물이 묻고 비를 맞는 종수는 불이라는 존재가 꿈결에나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돈, 꿈, 성평등, 사랑까지


삶에 온갖 신경 쓸 일이 쏟아지는 마당에 종수는 사랑까지 한다. 벤을 쫓아 스릴 넘치는 추격전을 벌이거나 기르던 송아지를 팔아 치우는 일, 아버지의 재판, 여자로 산다는 것, 해미가 빠졌던 우물 등 메타포가 쏟아지는 영화에서 관객은 길쭉한 러닝타임 동안 숨겨진 모든 의미를 찾는 일에 지쳐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소설을 쓴다는 종수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이라 함부로 결론 내버리기 쉽다.


그 수많은 메타포 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건 엄마와의 만남이었다. 16년 만에 찾아온 엄마가 오백만 원이 필요하다며 돈 이야기만 하는 장면에서 난 멈칫했다. 종수의 삶과 멀거나 혹은 가깝거나, 그 처지를 비교하며 거리를 재는 내가 얼마나 많은 자아를 사회로부터 빼앗기고 잠식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안개는 누가 일으키는가

영화를 본 관객이 종수의 행동을 피해망상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함부로 의심을 품고 심증을 더하여 확신을 가하는 것 역시 위험하지만 벤이 보여준 일련의 행동을 보자. 그것이 근거에 기반한 합리적 의심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미 이 시대의 많은 청춘 역시 사회적 불평등과 스트레스에 절어 있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문제를 자기 자신에게서만 찾는다. 자존감이나 우울, 무기력이 잉태한다. 그러니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 청춘의 눈을 가리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게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서 자기계발이라는 명목으로 그 감정을 팔아 돈까지 벌고 있지 않나.


그리하여 우리는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기본적인 사회 시스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에 짙게 낀 안개처럼 미스터리한 세상에서 해미가 남긴 말을 곱씹어봐야 한다. 진실은 무엇인가. 그녀가 썩은 물로부터 지독히 갈구하던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그렇게 종수는 결국 벤을 죽이고 불을 지른다. 벤이 의뭉스럽게 이야기했던 비닐하우스 방화가 우리 뇌에서 유추한 대로 정말 살인에 근접한 것이라면, 그가 두 달에 한 번쯤 가볍게 저지르는 일마저 종수는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일으키고 마는 것이다. 통쾌하긴 커녕 찝찝한 기분만 남아 겉도는 영화 마지막, 영화관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하품이 지루함을 참지 못해 하품하던 벤을 닮았다.


해미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제쳐두고 본 사람의 인생은 단언컨대 둘로 나뉠 것이다. 이 영화가 마치 세상에 원래 없던 것처럼 잊은 채 살거나, 이 영화가 없던 이전의 시절을 까먹고 살거나. 그리고 아마도 나는 버닝이 없던 시절을 까맣게 잊고 지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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