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이로 팝니다, 1등급 국산.
통장에 1200원이 남았다.
분명 통장은 위태로운데 웃는다. 어이가 없어서, 1달러에 가까운 돈이 남았다. 잠깐 두 손을 모으고, 팁이 없는 나라에 대한 경의를. 은행 출금 수수료는 1달러. 1달러를 뽑으려면 1달러를 내야 하다니. 숙소에서 제공되는 아침을 든든히 먹길 잘했다. 이스탄불에 묶인지 벌써 열흘. 비자를 내주지 않는 인도 대사관과 실랑이하느라 버린 돈을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나지만, 다시 참아보자. 허름한 대사관의 점심시간이 걸려, 스타벅스에 들어간 멍청한 어제의 나를 원망하고 오늘을 버틸 궁리를 한다.
길에서 파는 찐 옥수수 마저도 2달러. 이걸 어쩐다. 하다 못해 사람들이 길거리 고양이에게도 육포를 주는데 고양이와 육포를 놓고 다투기엔 내가 귀여움에서 밀린다. 지리멸렬하고 방대한 불안이, 집착이 날 덮친다. 가벼운 지갑이 무서운 이유는 아버지에게 진작 배웠지만, 단련된 초연함이 붙잡아줘서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는 숙소의 나이 든 매니저. 매일 숙소 테라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것이 일상이며 역시나 고양이를 참 좋아한다. 숙소 밖으로 어지간해서 나가지 않는 흰머리 동양인을 의아해하긴 했으면서도, 매번 함께 식사를 해주니 썩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다. 끼니는 때마다 다른데 착한 가격의 치킨과 맥주를 마시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주로 닭가슴살 덮밥을 시킨다. 1700원짜리 밥 치고 상당히 영양식인데 자전거를 탄 파키스탄 청년이 배달한다. 너무 자주 먹어서 '배달시키신 분' 같은 외침은 과하기 까지 하다.
그와 며칠에 걸쳐 흥정을 해, 파격적인 숙소 가격까지 정한 마당에 돈이 없다고 하기엔 궁색하여. 오늘은 아침을 많이 먹어 끼니를 거른다고 짐짓 여유로운 표정까지 지어 보인다.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한 건 맞는데, 그는 너무도 당연하게 두 개를 시킨다. 쯧.
미리 낸 방값, 환율이 올라 돌려준다는 재미없는 농담을 하며 건네는 밥. 모른 척 좀 해줄 것이지 노인네가 능글맞게 놀리기나 하고. 그래도 먹는 게 남는 일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다. 갑작스런 소나기에 다시 꾸준히 담배를 태우는 노인과 끊임없이 계좌를 확인하는 나. 짱구를 굴려본들 돈이 불어나진 않는데.
할 수 있는 걸 말해봐.
"이틀 뒤에 공항 가는 버스까지 미리 예약했으니 골치 썩이는 비자는 그때까지 끝장을 보겠지, 그렇지 않아? 그래도 호스텔에서 주는 조식으로 하루를 버티기엔 배고플 걸. 인간답게 살자고. 우리."
사지 멀쩡한 내 청춘을 팔도록 하지. 무려 메이드 인 코리아. 국내산 청춘, 할아버지한텐 이 청춘이 필요할 거 같은데?
껄껄 웃던 노인은 기꺼이 나의 청춘을 사겠다고 말한다. 평생 남기지 않았었던 자기 사진이나 멋지게 찍어달라고. 멋진 사람을 찍어야 멋진 거라고 투덜대긴 했지만, 이틀의 청춘을 남김없이 탈탈 털어 건넨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깨닫게 해 준 멋진 노인 덕에, 나는 조악하고 성실한 캘리그래피를 친구 녀석에게 5만 원에 팔았고, 내가 찍은 사진으로 프로필 사진을 갈아치웠던 수 많은 지인들이 원조를 보냈다. 이스탄불에 교환 학생을 와 있는 형에게 숙소에서 주운 낚싯대를 건네고 케밥을 얻어 먹는다. 다음 날 들어온 한국인은 같은 부대 출신이라는 인연에 빌붙었다.
고마웠어 영감.
한국에선 이거 참 안 팔리는데.
노인은 공항 가서 먹으라며 덮밥을 건넸다. 짓궂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