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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an 14. 2019

이토록 시시한 동물

영화 <똥파리>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두 개를 연속으로 보았다. 하나는 <들개>, 다른 하나는 <똥파리>이다. 두 작품은 닮은 점이 있다. 바로 '폭력의 관성'인데 <들개> 같은 경우 조금 더 지능적인 형태의 폭력이 등장한다. 폭력이 발전하여 형태를 갖추고 마침내 손쓸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는다. 반면 <똥파리>는 극단적이긴 해도 접근이 멀지 않다. 두 영화의 전개는 그래서 판이하다. 난 <똥파리>로 조금 더 가까운 폭력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처음 <똥파리>가 나왔을 때, 친구들은 나보고 이 영화를 보지 말라 말리기 일쑤였다. 그때만 해도 나에게 영화는 데이트 시간을 채우는 용도로 쓰이는 장치였기 때문에 이런 예술영화까지 챙겨 볼 이유는 없었지만, 아무튼 친구들이 보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늘 마음 한편 이 영화가 나에겐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었다. 언젠가 영화채널에서 틀어주기에 대충 훑어나보려 했지만 매번 끝날 지점만 보아서 이해할 수 없었다. 듣자 하니 양익준은 전세금을 빼서 <똥파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도대체 왜? 그렇게 집을 팔아 만든 영화는 러닝 타임이 긴 축에 속한다. 제작비에 대한 부담을 늘리면서까지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폭력이라는 장르가 늘 그렇듯, 조금의 액션을 가미하여 짠내 나는 '멋'을 연기하는 대다수의 주인공과 달리 상훈은 사나움 그 자체다. 그는 가정 폭력의 그늘에서 자랐고, 엄마와 여동생이 죽는 비극을 맞는다. 일단 그의 성장 배경은 그렇다만, 이후로도 관객은 수많은 가치판단을 겪는다. 언뜻 비이성적이기까지 한 상훈의 태도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일반화는 대단한 오판이다. 공교롭게도 상훈의 주변 세계에서는 수많은 사회 질서가 동시에 작동하지 않는다. 경찰을 패거나 술집에서 싸움을 벌이고도, 심지어 얼굴을 드러내고 용역 한 뒤에도 문제가 하나 없는 것은 엄청난 불행이다.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사회 시스템이 작동했더라면, 상훈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을 테니까.



이 나라 애비들은 집에만 오면
지가 김일성인 줄 알어


 가족의 사건 이후로 상훈의 성장 과정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엄마와 여동생이 죽은 데다 아버지는 감옥으로 일가족이 한순간에 와해되었으니 짐작만 될 뿐이다. 세상에 홀로 남은 소년이 오로지 생존에 몰두하면 이런 독기를 품을 수 있는 것일까. 한편, 출소한 아버지는 나약하다. 상훈은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항상 아버지를 때린다. 상훈이 강해진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시시해졌다. 늙었고, 병약하고, 타인 위에 군림할 힘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그것은 반성이 되는가. 어느 누구도, 또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으나 그 폭력의 역전으로 관객은 어떤 카타르시스에 접어든다. 상훈의 행동은 일견 정당방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용역 일을 하는 상훈이 떼인 돈을 받으러 갔을 때, 가정 폭력을 일삼는 채무자를 보고 뱉는 대사로 그의 입장이 대변된다.





 등장인물들은 죽음의 경계선을 불가침 영역으로써 철저히 지킨다. 죽음에 대해 현실감 없는 사람들보다 한참 가까이 겪어왔기 때문이다. 어느 날 손목을 그은 아버지를 업고 병원으로 달리는 상훈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다. 여동생은 지키지 못했으나 아버지를 살렸을 때 복잡 미묘한 심경을. 연희의 무릎을 베고 누워 처음으로 우는 장면에서 영화는 처음으로 그의 입장을 드러낸다. 상훈은 피해자다.


 누나의 집에서 연희와 상훈, 누나와 조카 형인이 함께 모이는 구도는 아주 이상야릇하다.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가족의 형태를 이루는데 그 순간만큼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애를 다루는 방식과 미묘하게 닮았다. 그러나 아주 미약하여 낌새만 잠깐 느낄 뿐이다. 다 탄 장작 밑 불씨보다도 옅다. 이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날 것을 알면서도 희망을 품게 만든다. 인간의 근간을 건드리는 기술이 이렇게 뛰어날 수가.



 상훈에게 아버지를 용서하라는 인물은 총 셋이다. 사장, 이복누나. 그리고 조카. 관계도 상으로 볼 때 타인, 가족(성인), 가족(아이)인 셈인데 반응의 강도가 차례로 옅다. 그러나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므로, 근본적인 면에서 타자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영화가 진행되며 극 중 상훈의 아버지 모습에 집중하였다. 그는 남루했고, 아주 시시한 동물이었다. 그래서 안쓰러움을 비롯한 다른 연민의 정서가 일게 만드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집중이 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용서는 타자의 몫이 아니다. 그 명제가 유지될 때, 사회질서가 적용되지 않는 상훈의 세계에서 설령, 아버지가 불쌍해 보인 다한들 그는 결코 용서될 수 없다. 죄를 비롯한 그의 존재가 다른 것으로 희석되길 노리는 움직임으로부터 이미 그는 인간성을 잃고 말았으니까.


 그리하여 상훈은 피해자다. 아버지는 감히 ‘쉽게’ 죽음으로 가려했고, 그러나 영화의 끝까지 살아남는다. 영화의 똥파리를 일컫는 건 아마도 분명히 아버지일 것이다. 그 원죄로 인해 벌어진 폭력의 전염은 연희나 영재가 겪는 염세적 폭력과 순도가 다르다. 그건 불우한 처지를 비교하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여분의 인간성과 좁지만 타인과 유대할 구석이 남아있는, 그리하여 최소한의 질서가 작동하는 연희나 영재와 아예 다른 계열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상훈을 일컬어 ‘저런 처지도 사람에 따라 극복할 수 있습니다.’라는 잣대는 아주 틀린 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 영화의 평을 보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 <똥파리>는 다큐멘터리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누군가에게 하이퍼 리얼리즘을 선사할만한 영화라서 그렇다. 깊은 성찰을 거치지 않았을 때 고작해야 이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찝찝하고 불편함’ 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으면 좋겠고, 그러나 보란 듯이 폭력에 대해 비슷한 감수성을 향유하는 관객들의 후기를 보며 씁쓸한 입맛을 다신다. 인간은 도처에 널린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양익준이 전셋집을 빼면서 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던 건, 아마 비슷한 상처를 후비다 돋아난 새 살을 견딜 수 없어서일 것이다.


 세상에는 비겁한 가해자들이 너무나 많은 탓에 고통은 늘 피해자의 몫이다. 대개 이 영화가 좋다는 사람은, 엇비슷한 자기 고백을 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그러나 해방을 누릴 지점은 늘 자기 암시 너머에 존재한다. 슬픔이 가득하더라도 우리는 부디 용기를 내자. 그리고 기억하자. 상훈은 보잘것없이 시시하고 비루한 괴물이 만든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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