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 건배

잘 잡아요, 추락할지도 모르니.

by 박하


걸출한 느낌을 주는 콧수염이 당황스럽긴 하지만 내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뜬금없이 이게 웬 오지랖인가. 스튜어디스가 떡하니 끌고 다니는 카트에도 있는데, 무슨 범죄도 아니고. 조금 불쾌한 감이 없지 않아 있어도 무시하기로 한다. 그래도 내가 당신보단 오래 살 것 같네요. 이코노미 좌석이 불쌍할 만큼 뱃살이 한 움큼 나온 남자는 내게 맥주를 마시지 말라며 다시 한 번 경고한다.


내가 맥주를 마시기 시작한 건 일 년이 채 안된다. 맛있다고 느끼기에 건방질 정도로 어린 건 별개로, 맥주라는 건 일종의 기호품이면서도 사치품이어서 물론 저렴하지 않다. 천성적으로 받지 않는 술에 한 모금만 넘겨도 새빨개지는 볼, 만취한 사람인냥 취급받아도 정신은 또렷하다.


독이라도 탔어요?


함께 주는 플라스틱 잔이 종이컵만 해서 영 기분은 안 난다. 거품도 안 나고. 그냥 캔째로 마셔야지. 옆에 앉은 남자는 독일인이다. 페루에서 스페인으로 떠나는 저가 항공기에 독일인이 앉아 있는 이유는 의문이지만 한국인인 나도 별 다를 바 없으니. 독을 타진 않았지만 독이 될 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남자. 타임스에서 눈을 떼 지도 않고 말한다. 의사인가, 기내식도 비프가 아니라 피쉬를 골랐으니 나온 뱃살 때문에 건강을 챙기는 중인 사람일 수도 있고. 아랑곳 않고 컵을 든다.


쿠바, 바라데로 상공 (2013)


아니, 하이잭이라도 하실 계획입니까. 낙하산을 메려면 만취상태가 곤란하긴 하겠네요. 퍼스트 클래스가 아니라서 어차피 마음껏 마시지도 못해요. 믿든 말든 당신의 자유인데, 나는 원래 술을 잘 안 마십니다. 뭐, 유쾌하다면 유쾌한 인간이고 과묵하다면 과묵한 사람이지만. 취할 생각은 없습니다. 되려 맥주가 비싸서 못 먹었다는 이유가 선택에 있어 더 비중 있는 이유겠지요. 난 가난한 세계 여행자니까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서양인들인데도 이런 참견은 처음이어서 그런 식으로 쏘아붙였다. 안경을 벗고 갑작스레 환한 미소를 보이며, 그는 신문을 접고 식사를 시작했다. 어긋남에 대한 어떤 철학이 있는 듯했다. 싸울 준비가 무색하게도 그는 그쯤에서 딱 멈춰 섰지만.


그는 곧이어 나와 같은 맥주를 시킨다. 아니, 이건 도대체 무슨 경우냐. 기가 막혀하는 날 두고 식사를 하는 그는 꽤 흥미롭다. 어떤 여정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한데 당최 알 수 없는 행동에 대한 대답을 캐묻기도 민망스럽게, 그는 정성스레 식사했다.


"일단.. 건배라고 하나요? 그쪽 나라에선?"




일본인에게 배운 듯한 발음의 '건배'는 다시 날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잔을 부딪혀 한 모금을 마시자 그는 이야기를 한다. 대사관 직원인데, 알코올 중독인 아내와 이혼했다고 한다. 자신이 술을 끊어보아도 관두지 않는 음주에 결국 이혼을 했는데. 이혼 후, 스페인에서 살던 여자가 결국 죽었다고 한다. 간 경화 라던가. 연락을 받았으니 일단은 가고 있는데, 좀 예민해졌나 보다 하고.


캐나다, 토론토 상공 (2013)


그런데 이 맥주 참, 좋네요.


그럼, 얼마나 많이 얻어 마셨는데. 이제 남미를 떠나며 다시는 이 맥주를 마실 수 없다는 사실에 시켰다고. 그에게 답한다. 사실, 어제 두 병이나 마시긴 했는데. 비행기에서 이렇게 또 만나니 안 마실 수야 있나. 그리움에 대한 작별 인사랍시고 비행기에서 그와 술을 든다. "치얼스."


그런데, 공중에서 이렇게 취하다 기내에서 구토라도 하고 소란이라도 일으키면 어디서 처벌받을까요. 아니면 갑작스레 심근경색을 일으킨다거나. 그 쪽은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 위험한 거 아니에요? 난 모르는 척 할 겁니다. 이런 괜찮고 좋은 술을 마시는데 말리다니.


그가 사는 맥주를 두 캔 더 마시고서야, 우리는 지적받았다. 높아진 목소리에 애들처럼 낄낄대며 수다를 떨다가 이내 비행기는 착륙을 알린다. 죽음을 마주하러 가기 전 그는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유쾌했던 걸까. 다시는 못 볼지 모르는 사람에겐 마음의 문턱이 조금 낮아서 이런 저런 하소연을 쏟아낸다 한들, 편치 않은 마음을 낯선 동양인 술친구와 함께 잊었으면. 그러나 그 생각은 1분 만에 취소.


착륙과 동시에 그는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친다.

승객 모두가 우리 자리를 주목한다.


이봐요. 취했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그 혼자 미치게 둘 수 없으니.

제기랄, 나 역시 힘껏 박수를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