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의 왕국

더 대단한 사람들

by 박하


앞서 적은 아파트의 맞은편에도 아파트가 있었다. 오히려 자주 가는 곳이다. 둘 다 합정역으로 통해 있지만 교보문고가 마련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달로는 처음이다. 잔뜩 화려한 아파트 옆에 있어서 그렇지 상대적으로 수수한가? 아니다. 그냥 보편적이다. 그러나 특별한 점이 있었으니, 내가 이곳 배달을 잡을 때마다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당신은 모를 거다. 사실 배달부가 가장 많이 보는 건 고객의 얼굴보다 경비원의 얼굴이 더 잦다. 경비원이 없는 집은 같은 얼굴을 만나기가 어려우니 당연히 경비원 분들의 얼굴이 보다 익숙한 것도 당연지사. 이 아파트의 이름이 푸르지오라는 것을 공개하고 싶을 정도로 난 여기가 좋다.


일의 특성상 처음 방문하는 곳의 주차는 눈치에 의존한다. 더러 의도치 않게 주차구역이 아닌 곳에 할 때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 아파트에 처음 갔을 때도 마찬가지로, 정차되어 있는 차들이 많길래 그 뒤 알맞은 자리에 주차를 하고 배달을 했더랬다. 경비원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내 오토바이를 끌어 옮겨 자전거 주차장 한편에 고이 모셔두었다. 인도에 올리는 게 괜찮을까 싶은 걱정 때문에 꺼렸던 내게 아저씨는 인자하게 말했다. 멀리서 걸어오지 말고 자전거 주차장 옆에 대도 돼요. 주민들도 그쪽에 나란히 대니까. 같은 말이라도 이렇게 할 수 있다니! 배달부로서 싫은 소리를 듣지 않았던 경비원은 이 아파트가 유일했다. 슬픈 일이지만.



그러나 이곳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어쩐지 모자라다. 나는 이 아파트도 건너편과 같이 부자들의 전유물이겠거니 생각했다. 제발 전화나 받았으면 하는 심정으로 갔다. 입구를 맡는 경비원이 공동현관을 열어주었고 나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아도 되었다. 그 사이 오고 가는 주민들이 경비원과 다정히 인사했다. 강렬했다. 가장 고층에 다다랐을 때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얼마나 멈춰 있었을까.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최상층에서 보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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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죠?


순찰을 돌던 경비원 아저씨가 웃으며 다가왔다. "네 멋지네요.." 그는 넋을 놓고 있는 나를 보더니 한 마디를 더했다. "저도 매일 보는데 참 멋있어요. 그래서 순찰도는 것도 즐겁고요. 오늘은 미세먼지도 없이 맑아서 북한산도 보이는 것 같네." 그랬다. 빌딩에 가려 안 보이는 것들은 죄다 가까워 보였다. 유리 너머 아래를 보니 까마득히 점이 된 사람들. 단조로운 형태의 아파트에게 생전 느낀 적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아파트를 싫어했던 건 엘리베이터 앞 답답한 공간에서 훅 끼쳐오는 특유의 냄새. 양 쪽으로 있는 각각의 문을 선택하면 끝나는 일이라서 그랬나 보다. 어떻게 복도 한 면을 통유리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고작 배달 온 사람에게 보여줘도 될만한 풍경인가 싶다. 경비원 아저씨도 이 풍경을 매일 보겠지. 내가 들고 온 음식도 하필 떡볶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같은 것을 먹고살아도 다르게 산다는 걸 깨닫고 만다. 멋진 것들을 멋지다고 알려주는 건 이렇게 다르니까. 멋은 부리는 게 아니라 드러나는 거라고 누가 말했었는데.




떡볶이를 받은 고객은 문을 열자마자 잔에 담긴 당근주스를 건넸다. 더운 날에 고생하셨다고 말하면서 그랬다. 잠에서 덜 깬 모습이었지만 배달부가 누른 벨소리를 듣고 주스를 잔에 따르는 일은 무려 잠에서 덜 깬 모습이었기에 더 대단했다. 이건 삶에 배어있는 것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타인을 위해야 하는 일이며 알고 있어도 실천하기 어려운 태도다. 실례하겠습니다. 헬멧을 잠시 벗은 뒤 터번을 내리고 주스를 들이켰다. 정말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다시 창 밖을 봤다. 유리에 반사된 나는 땀에 머리가 짓눌려 있었고 깎지 않은 수염이 너저분했다. 냄새가 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바깥은 너무 아름다웠다. 도로 지상으로 내려가야 하는 나를 슬퍼할 맘은 전혀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띵 하며 도착음을 낼 때 다시 와야지 라는 생각만 남아있어서 현관을 나설 땐 경비원 아저씨와 기분 좋게 인사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잠깐 살피는 복도의 창은 오늘 이 집을 나서며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듯한 기분을 줬다.


이후에도 여러 번, 난 푸르지오에 갔다. 미세먼지가 가득해 뿌옇게 된 날에도, 먹구름이 낀 날에도, 창문은 그대로 있었다. 안쪽으로 꾸려져 있어 상가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볼 뿐인 공중정원과는 달랐다. 바깥을 보며 언제고 너른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큰돈이 생긴다면, 서울에 살아야만 한다면 이 아파트를 사고 싶다고 주변에 누누이 말하고 다녔다. 멋진 곳이었다. 멋지게 살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