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올해는 여지 없이 길다.
올해도 벌써 끝이네.
박 병장, 당신에겐 끝이지만 나는 아직이다. 올 겨울이 지나 한여름을 꾸준히 죽이고서야 비로소 세상에 돌아갈 나는, 막사에 비닐겹을 붙여 월동준비를 한다. 이번 겨울도 지내야 할 채비를 내 스스로 하는 셈이니 이번 해의 눈을 쓸기 전에 전역할 병장의 말이 참담하다. 그 때도 그랬지만 십일월은 늘 없는 셈 쳐졌다. 사회에 나와서도 아니 입대를 하기 전에도 사람들은 한결같았다. 십일월이 되면 십이월의 연말 행사 준비를 하거나, 아예 다음 해를 기약하는 말에 난 괜히 심술이었다.
십일월은 그렇게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곡은 십일월에게서 가을을 앗아가 버렸고, 모든 축제와 행사는 마지막 달인 십이월에게 양보했으니 십일월은 을씨년스러움만 남았다. 어쨌거나 내년은 오는데 늙기 싫다던 사람들이 하나 둘, 새해를 준비하는 꼴이라니. 한 발 앞서 낡은 것이 된 십일월이 슬프다.
친구는 말했다. 혼자 사는 그 녀석은 무기력해진 건지, 더 이상 뭘 하기 싫은 건지 몰라도 그렇게 말했다. 매 년 오는 새해가 이번엔 얼마나 남다르고 거대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 말에 삼 년 만에 귀국하는 기러기 아빠를 마중하듯 정성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빈티지와 앤티크는 인테리어에서만 쓰이는 말인가. 고풍스러운 시간과 낡고 예스러운 시간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사망 선고 같음에.
단호히 말하는 폼이 그럴 듯하다. 외계인을 믿는 놈이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으니 훔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우리가 여태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박 병장, 그놈.
나에겐 없었던 십일월이 분명 그놈에겐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춥지도 않은지 반바지를 입고서 누워있는 본새는 영락없는 말년 병장이었으나 그놈은 분명 십일월이 길다고 했다. 어느 새 도둑 맞은 건가. 아니 범인은 그 녀석이 아니야. 진득하게 누워있으려다 먼저 집을 나서는 친구를 따라나선다.
겨울 옷을 입어야 할지, 가을 옷을 입어야 할지 애매한 공기에 정처 없는 걸음에도 거리는 조용했다. 이번 십일월은 잘 감시해야겠다며 나선 생각에도, 역시나 특별한 것 없이 보잘것없는 이번 달이 아쉬워 낯선 카페를 들어선다. 여기 커피 한 잔.
친구가 지목한 도둑은 '내년'이었다. 십이월은 눈에 띄니 십일월을 훔치자고 한 말도 범행 동기로 보기에 충분하다. 도둑 당하는 줄도 모르고 지나쳐 온 채 맞이한 스무 번째 십일월. 설마, 벌써 올해를 포기한 건 아니지? 박 병장 놈 역시 그랬다.
알고 보면 사실, 나의 역사는 십일월에 집중되었다. 한 해가 한 달 남짓한 시기에 난 연애도 시작했고, 그 이전엔 휴학도 신청했었으며, 또 어느 해인가에 군대를 갔다. 다시 여행을 시작한 날 역시 십일월이었다. 섣불리 마무리 짓기에 엄청난 일들이 벌어진 이 달을 어찌 미워할 수 있으랴.
이미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 이마저도 놓칠 순 없다. 십이월은 마무리의 시간을 갖을지라도 십일월은 내년에게 훔쳐졌으니, 내년과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 빌어먹을, 눈이 오기 전까진 팍팍하게 날 달궈야겠구나. 도대체 얼마나 열심히 살라는 거야. 투덜대며.
나는 올해 역시, 십일월의 탈출을 돕기로 한다.
보다 열정적인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