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먹히고 말 거야

트라우마를 상대하는 이유 있는 반항.

by 박하


소리를 질렀다. 나도 모르게 나온 포효는 궁지에 몰린 고양이의 울음 같은 것이어서 엄마는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꾸짖는 목소리와 함께 엄마의 손이 올라가는 순간 나는 어떤 것에 대한 방어를, 다소 과하게 내질렀다. 비슷하게 벌어진 일이 이미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나 역시 잘한 일이 아니지만, 이건 분명 문제가 있다.




빵 먹고 싶어.


나는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엄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밥을 하고 있다. 사실, 밥 짓기도 귀찮았을 텐데 서울로 교육을 받으러 간 동생과 시내에 나간 아버지를 제하고도 굳이 '나' 때문에 꾸역꾸역 밥을 하고 있다. 이내 얼굴 핀 엄마를 데리고 빵집에 가기로 했어도, 엄마는 취사 버튼을 누른다.


DSC07415-2.jpg 처음으로 호흡곤란을 겪은 곳. 판공초 가는 길, 인도의 창 라 로드(5300m)


엄마는 운전을 하며 듣지 않는 아들의 귀에 이야기를 쏟아 넣는다.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엄마의 끝없는 걱정은 남편을 향한 것이었다. 한 날 한 시에 같이 묻힐 사람인처럼 말하는 것이 나는 익숙했다.


익숙한 택배 회사 앞을 지나는 길이었다. 이번에 아버지는 건강검진을 받았나 보다. 엄마의 말만 들으면 심근경색을 조심하라던데. 매일 같이 마시는 술과 담배로 몸이 지친 아버지가 식습관마저 불균형하니 가만 보면 '몸에 안 좋을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 수시로 들곤 한다. 그래, 나도 그런 적이 있어 생각을 해 본다.



와이나 픽추를 오를 때 마추픽추에서 파는 생수가 너무 비싸 물 한 모금 들고 가지 않은 것은 나의 잘못이었으나, 느닷없이 손발이 마비되고 호흡이 가빠질 때 비까지 내려 결국 우의를 바닥에 펴고 누웠다. 제대한지도 얼마 안 된 남자가 쓰러지니 속된 말로 개쪽이었어도. 누워서 잠시 있으니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그 공포는 잊지 못한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도로라는 곳을 건널 때에도, 날 신기하게 쳐다보는 외국 사람이 가득한 버스 안에서도. 느닷없이 닥치는 이름 모를 마비에 잔뜩 긴장해서 병원을 가 보면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다는 진단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DSC06831.jpg 다음으로 호흡곤란을 겪은 곳. 마추픽추 정면으로 보이는 봉우리(와이나픽추)에서 쓰러졌다.


나도 심근경색 아닐까.


무심코 한 말에 엄마는 갑작스레 나를 때리려 들었다. "아이고 이 새끼가." 그 손을 막으며 소리를 갑작스레 질렀는데, 겁에 질린 내 목소리에 내가 더 놀란다. 엄마에게 이런 저런 되지도 않는 말을 이어 붙이며 소리를 지르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를 지경.


그 이후에 흐르는 정적을 깬 건 엄마였다.


"너 왜 그렇게 예민해?"

그런가. 내 스스로가 예민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엄마에겐 나의 행동이 어떤 버르장머리 없음 이었을지도. 하지만 겁에 질린 나 자신은 분명히 있다. 도대체 뭐가 그리 겁나서. 키로 따지면 내 어깨 한참 아래로 머리가 있는 엄마를 겁내서 그런 반응을 보였나. 하지만 내가 가족에게 폭력을 사용한 적은 없는데. 그런데, 엄마가 과연 때리려 들었던 것이 맞나. 그 올라간 손에서 잊고 있던 공포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일. 때문에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DSC09236.jpg 세 번째 마비. 인도의 버스 안에서 마비가 왔지만 애써 괜찮은 척을.


그래도 빵은 사러 빵집에 들어간다. 내가 먹고 싶은 빵 말고도 아버지가 좋아하는 빵, 동생이 좋아하는 빵을 고른다. 엄마는 쟁반에 고작 카스테라 하나를 올린다. 어떤 퉁명스러움이 고개를 내밀어 아버지 것, 동생 것을 도로 내려놓는다. 왜 다시 내려놓냐는 엄마의 말엔 대꾸도 않고.


돌아가는 차에도 감돌 줄 알았던 어색함 대신 엄마의 목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여전히 이어지는 걱정, 아침 드라마처럼 어제도 오늘도 다를 것 없이 반복되는 이야기들. "아버지랑 동급인 것처럼 말하면 안 돼." 엄마는 말한다. 그렇게 구박받고 살아온 세월 속에서도 그 권위를 지키려는 말에 소름이 끼쳐 왈칵 화가 치민다.


눈 위로 올라간 손의 손아귀만 보일 때, 나는 분명 그 손이 두렵다 느낀 걸 깨닫는다. 나의 느낌이 말해주듯 시간이 치유해주지 못한 상처와 덮은 이야기들을 되짚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왜 그렇게 살아왔냐는 말도, 다른 어떤 나쁜 말도 엄마에겐 더 상처만 될 뿐.



조용해진 말의 틈 사이로 중얼거린다.


"그래서 안 산 거야, 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