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저는 판돈을 올리겠어요

낯선 타인에게 거는 기대.

by 박하


서울에서 주말 꿀잠을 자던 직장인을 깨워 느지막이 요란한 거리로 불러낸다. 누나를 알고 지낸 시간이 무려 오 년. 오로지 승낙 외의 선택지가 없는 우리의 관계는 두텁다. 그 와중에 씻을 시간을 챙긴 그녀와 들어본 적 없는 종류의 커피를 주문하는 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할 나름의 준비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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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엔 어디로?


안부의 형식 없는 첫마디에 역시 탄성을 뱉는다. 과거의 추억을 훑다가 시간 여행의 종착지인 현재에 도착하여 근황을 나눌 때, 비로소 처음 질문의 답을 내놓고 만다. 지나칠 만큼 탄탄한 소셜 네트워크에 스스로의 근황을 끊임없이 끼적거리니, 모든 이야기는 한 줌의 재방송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세간의 과대평가는 그칠 줄 몰랐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바쁘게 변해버린 나의 일상 속, 멀리 떨어진 사람의 안부를 묻는 것이 뜸해졌다고 느낄 때쯤 보내는 문자 한 통에 옆에서 날 지켜보던 친구가 하는 말. 너 사람 정말 잘 챙긴다.


거짓말. 네가?

그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누나의 시각이 더욱 나와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라 말하는 사람에게. 강, 개울, 바다는요? 언덕, 고개, 구릉은요? 이름은 또 어떻고요. 낙동강, 동해, 태평양. 지리산, 에베레스트, 태산. 수도 없는데요. 그런 내게 질려서 떨어져 나가면 나갔지. 지름길을 놓고도 모든 길을 사정없이 누비는 나를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다고. 그래서 어쩌면 내가 사람에게 느끼는 애증이 당연한 걸.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한 괜한 기대가 주는 실망은, 그 이후의 나를 기대치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네 기대 같은 건 필요 없어.’ 가끔 그런 투로 말하는 사람을 볼 때면 응, 그래 알았어하고 바로 수긍해 버리고 말지만, 여전히 밑바닥만 남은 기대를 체포하지 못한다. 내 옆에서 소변을 보는 남자가 나가면서 손을 씻어주기를, 방금 시원스레 콜라를 마신 사람이 트림을 하지 말아주기를, 어쩐지 소주가 생각나는 첫 대면의 자리에서 내 앞에 ‘술 혹시 드세요?’ 한 마디 말없이 술잔을 놓지 않기를, 손에 짐이 가득 들린 상태에서 등록되지 않은 번호로부터 전화벨이 울리지 않기를. 결국 간절히 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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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마지막 자존심 아니야?


이제 누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박민규, 신경숙, 박범신, 조세희, 공지영, 황경신, 김연수.. 이런 사람들은 과연 어떨까.” 알지도 못하는 메뉴를 시키고 마주 앉은 그녀는 사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달고 책을 낸 작가. 펜으로 슥슥 이어가는 선에 나타나는 그림들을 담아, 누나는 책을 냈다.


생각보다도 너무 다른 출판업계와의 협상에 지친 모습으로 내게 연락을 했었고, 꼬박 몇 년이 더 흘러서야 우리는 이렇게 만났다. 제목마저 시장의 유행에 따라 출판사에서 정해주는 대로, 물론 폰트도. 자신이 만든 창작물에 그토록 피해 다녔던 ‘서른’이라는 단어를 집어넣는 것이 그리도 원통했다던 누나는 이제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인기가 없어 추가 인쇄를 하지 못했다며 웃는 그녀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 사람으로 돌아왔다고. 쓸쓸히 웃고 만다. 우리는 착한 사람이 될 필요 없다고. 기대와는 사뭇 달랐던, 그 어떤 배려조차 없었던 사람들과 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고.


그래, 사람에게 거는 제멋대로의 기대만큼 상대방은 그렇게 행동해 줄 이유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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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꾸준히 읽던 부분의 페이지를 펼친다. 이 작가는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을까 의아한 마음이 문득 드는. 이런 유명한 작가들은 제목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난 기대라는 판돈을 올려보기로 한다.

손을 씻거나 트림을 하지 않거나, 사소한 배려를 넘어 어떤 영향이 생길만한 위험을 사람에게 걸어보는 스릴이 목말랐으니까. 지금 나의 선택에 스스로가 불안해하지 않기를 바랄 뿐.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낼 나는, 방금 나의 모든 짐이 든 가방을 옆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맡겨 보고 화장실로 향한다.


오늘도 나는 미련스러운 기대 한 줌이 주머니에 남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