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은 없다

여행자의 발걸음이 가진 무게.

by 박하


변한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시간이 흐른 후의 그곳을 다시 한번 찾아야 한다. 어디가 어떻게, 그 사람들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내가 어째서 그 시절, 그 시간에 빠져 사랑을 하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파했는지. 그렇게 나는 한 곳에 꼼짝없이 있질 못하고 결국 다시 떠나야만 했음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다.


인도, 바라나시 (2015)


범죄 없는 도시 12년 팻말을 붙여 놓았던, 동강이 흐르는 강원도의 작은 시골마을이 어느 날 불현듯 일어난 범죄로 하루아침에 팻말이 뽑힌다거나. 참으로 인심 좋던 어느 외딴섬의 기억을 갖고 다시 섬을 찾으니, 외지인을 납치 살해한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거나 하는 목격은 드물었지만 없지 않았다.


나 역시 여느 여행자처럼 말했던 것 같다. 다시 올게요. 그러나 같은 곳을 다시 가는 일은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시시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꾸준히 같은 곳을 방문하는 이유는 이 나라가 사계절 이어서도, 놓고 온 것이 있어서는 더욱 아니었다. 그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거슬린 나는, 결코 양치기 소년이 될 수 없었다.





그는 뻐근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반 년쯤 지난 어슴푸레한 새벽, 더듬을 필요도 없는 기억으로 길을 찾는다. 돌아온 쿠스코의 한 숙소 앞에서 불쾌하리만큼 문을 두드려 주인을 깨웠는데 그는 나를 알아봐 주었다. 처음 그와 만난 때보다 살이 15kg쯤 빠지고 머리는 한 뼘 정도 더 길어졌으며, 얼굴은 훨씬 새카맣고 하얗게 탈색한 머리에 번개 맞은 듯 머리까지 볶은 나를. 어떤 멈칫거림도 없이 단박에.


그렇다. 나는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그런 멋진 일이 이후에도 몇 번인가 더 일어난 것은 내 삶 가장 윤기 나는 일이었다. 함부로 까다로우리라 여겼던 세비야의 어느 전망대 카페에서, 공짜로 술 한잔을 건네는 이유가 '왜 이렇게 오랜만이냐'는 것. 제주도에서 비를 맞으며 걷다 도착한 황토방의 할머니를 삼 년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영감이 먼저 갔다는 말을 더없이 덤덤하게 말하는 바람에 펑펑 울어버린 건. 실로 빛나는 일이었다.


인도, 바라나시 (2015)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 만에 돌아가 지난날의 내가 찍어 놓은 발자국을 찾는 것은 미련했다. 시대가 변하는 것을 보는 목격자가 되고 싶다던 과거의 내가 무색하게, 시대의 변화를 목격하는 것은 무섭도록 불편했다.


사실, 나는 살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을 봤을 때 갖고 싶은 마음이 딱 그 정도의 무게인 것처럼 더도 덜도 없이, 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다른 나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아니었다. 삶이 어떤 방향으로 더 나아지리라는 허튼 기대로 채워지지 않은, 애착이 짙은 도시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점점 방문이 빈번해졌다.


항공권은 때로 저렴했고, 차 한 잔에 돈 쓸 일이 없는 인심에 나는 안도했다. 이번에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은 기우였고 시간은 멈춘 듯, 사람들도 여전한 것이. 그 어느 순간 변해버린 낯선 도시에, 내가 다시 기억에 붙잡힌 이방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이 낙원이 시한폭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인도, 바라나시 (2015)


'낙원이 지옥으로 변하는 것은 공리'라고 적힌 페이지에서 책을 덮는다. 이 땅 역시 변하게 만든 것은 결국 수많은 나의 발걸음들이었음을. 어떤 새로움도 찾지 않게 된 나의 방문을, 익숙해져 버린 낙원이 끝내 터져버렸음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다시 짐을 싸서 길을 나선다.


더 이상 꿈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과, 문제없다던 말 대신 큰 문제가 되어 버린 사소한 일들이 나는 너무나 무거워져 버려서. 마치 모든 게 처음인 것처럼, 옛날을 끌어오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을 하고 만다. 그렇게 여행자는 어느새 걸어 다니는 돈 주머니가 되었다.


여태껏 12개국을 다녀 이제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던, 친구의 말과 달리 18개국을 넘나들던 나는 그 어디서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차마 다시 온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아 마냥 웃어버린 오늘은, 우습게도 가장 많이 웃은 날 같아 웃어 버린다.


이렇게 나는 또 하나의 낙원을 놓아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