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브’ 앤 ‘기부’

직접 해보았습니다, 봉사단체의 허와 실.

by 박하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옷을 사 주면, 당신과 하룻밤쯤 자 줄게.


아이는 창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제안했고 나는 도망쳤다. 기껏 사진 한 장을 들고 주섬주섬 기억해 낸 그녀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며 집 가까운 골목에서 그녀를 찾아 헤맬 때, 왜 그녀를 찾느냐 묻던. 동네 사람들이 짓던 험악한 표정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나는 창녀를 찾고 있었다.


볼리비아, 포코포코(2013)




그 해 가을, 그러니까 아이가 몸을 팔기 4년 전. 인도에서 만난 그 남자는 꽤 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마음 맞는 사람 몇을 더 모아 갠지스 강 건너에서 함께 놀아주던 일들을 넘어, 학교를 지어보자고 그에게 제안했을 때. 그는 자기도 그럴 생각이 있었다며 맞장구를 쳤다. 어렸던 소년에게 벌써 뭐라도 된 듯 맞장구를 쳐주니 소년은 들떴다. 그의 영악함 따위는 살필 겨를 없이.


여행을 마치고 바로 끌려가게 된 군대에서 틈틈이 이동학교에 대한 자료와 국가 경제지표 따위를 찾는 것이 고작이었던 나는 휴가마저 헛되이 쓰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온 그를 만나 정보를 공유하기 바빴으니.


종교를 인질 삼아 돈을 긁어모으는 일은 정말 쉬웠다.


지방 모 대학교의 강연장에서 다시 만난 그는, 꽃거지 타이틀과 연출용 맨발을 가지고도 충분히 인기스타였다. 언변이 좋았고 극적인 요소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인도의 갠지스 강 너머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놀았어요.” 이제는 지겹도록 들은 레퍼토리에 진절머리가 날 무렵, 학교를 짓기 위해 백 원만 달라는 슬로건에 너나 할 것 없이 백 원을 건넸고 가끔 누군가가 만원이나 보내서 돌려줘야 한다는 포스팅은 증명되지 않은 채 홍보 효과만을 불러일으켰다. 드문드문, 선착순으로 금액 제한 없는 용돈을 보낼 수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글에도 사람들은 경쟁하듯 돈을 던졌다.


볼리비아, 수크레(2014)


그는 자신이 가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미를 정했다. 열악한 환경이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비교할 수 없지만 그중 볼리비아는 ‘남미 최빈국’이라는 또 하나의 슬로건(그의 말을 차용하자면 ‘임팩트 있는’)으로 자리매김했다. 함께 다니며 무수한 다툼이 일었고 그의 여자친구까지 두 명을 상대하며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경우는 흔해 빠졌었다.


코이카, 굿네이버스, 북스 인터내셔널, 해비타트, 월드비전, 유니세프. 만났다면 많이 만났다 할 수 있는 여러 단체들. 사진가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나 홀로 일하긴 했지만 차례로 파악되는 단체의 성향, 배워야 할 점과 배우지 말아야 할 점을 가슴에 아로새기는 날들. 그렇게 나도 남미에 자리 잡았다.


돈은 기독교에게, 도움은 천주교에게 받았다. 그 황량하고 구석진 마을에 계신 한국인 신부님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덕에 자리를 잡고, 지나던 여행자들을 끌어모으는 일이야 어렵지 않은 일.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을 갖고도 허리가 아파 단 한 번도 학용품을 들고 따라나서지 않았던 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배낭을 짊어졌다.


볼리비아, 라파즈(2013)


소용돌이치는 안데스 산맥 사이로 빠져들었다. 처음 본 이방인, 낯설고 귀한 손님이 왔다며 간이 되지 않은 감자와 달걀. 삶은 콩 한 줌. 맛은 둘째로 치자. 그렇게 그들의 하루치 식량을 빼앗고 우리도 챙겨 온 식량을 건넨다. 학용품과 식량을 건네고 돌아와 그는 수고했다며 고기와 술을 제공한다. 미처 돌아오지 못한 영혼과, 무려 삼일. 아니, 바로 오늘 아침까지 돌아오는 길에 먹었던 감자에 대하여. 괴리감에 휩싸인 채 찍은 사진과 영상을 정리한다는 이유로 늘 뒤풀이 자리를 피했다.




불쌍하게 좀 찍어봐.


그의 말에 나는 맥없이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이미 단체는 그의 추종집단으로 전락했고 그의 눈치를 보기 바빴으며, 볼리비아의 가난한 아이들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장깃말에 불과했다. 말없이 짐을 정리하고 떠나는 날, 그는 나에게 20달러짜리 한 장을 건넸다. 나의 7개월 치 월급이었다.


그 후 나의 사진을 마음대로 이용하다 덜미를 잡히자 그는 나의 모든 연락수단을 차단했고, 예감대로 우린 서로에게 개자식이 되어있었다. 나는 나의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인도, 파테푸르 시크리(2011)


인도에 다시 도착했을 때, 처음과 4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을 덮어놓고도 꽤 감상에 젖어 거리를 추억하고 그 아이를 찾아내었을 때. 그녀가 입 밖으로 낸 말이 머릿속 어느 지점에서 멈춰버린 듯 넋을 놓고 있을 때. 나는 다시 그 남자를 떠올렸다. 아직도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그녀와의 추억을 팔면서 돈을 긁어모으고 있을 그를. 누군가 준 용돈 혹은 누군가 줬을 백 원으로 고기를 씹고 있을 그를. 난 그 자리에서 도망쳐 그 날 하루 꼬박 울음을 토했다.




혹시 꽃거지 알아요?


세 번째 인도. 얼마 전, 갠지스에서 만난 여행자가 묻는다. 여행자가 말하는 고향을 듣고서 나 역시 그 남자로 인해 알게 된 카페 이름을 말하자 대번에. 네 잘 알죠.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그래요? 저도 거기에 기부하는데. 그녀는 마치 칭찬을 받으려는 듯 자랑스레 이야기를 꺼낸 티가 역력하다.


숨을 고르고 나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창녀를 잊는 중이라고.






*사진속 인물들은 글 내용과 관계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