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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방인

오늘의 5분

투표하러 왔어요.

by 박하


내가 미쳤지.


왜 그랬을까. ‘투표를 하러 수도에 간다.’ 홍보 자료를 만들어 놓고 꽁쳐두고 있는 선관위에선 하다 못해 그 흔한 포털 사이트 배너광고조차 않았다. 아니면 내가 못 본 걸까. 평소 관심 있던 모 웹툰 작가의 SNS에 올라온 글을 보고서야 재외투표 신청기간임을 알게 됐다. 순기능이란 이러한 것일지언정, 내가 왜 이런데서 투표 기간을 알게 됐을까 하는 자조와 함께.


뭐 한심하다면 한심할 수 있다. 딱히 관심 없는 건 자랑은 아니지만 요즘 세대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만큼 바쁜 세대라고, 타인의 방관에 고개를 끄덕끄덕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나 스스로가 미친 짓으로 여기는 수도로의 발걸음은 꼬박 기차 열다섯 시간. 난 투표를 하러 가는 중이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물음에 그렇게 말했다. 대답하는 그 순간까지 꽤 우스웠던 내 행보가 진지한 그의 끄덕거림에 사르르 녹는다. 그에겐 아주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DSC04212.jpg New Delhi, India. (2016)


바나나 잎으로 만든 그릇은 왜 산 걸까. 저렇게 잔뜩이나. “친환경 제품이잖아.” 길거리 음식을 담아주면 사람이 다 먹고 바닥에 그릇을 버린다. 그리고 소가 먹는다. ‘독일로 가져가 연구해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아서.’ 이 나라에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을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승화할 그가 덧붙인다.


그런 그가 끄덕였으니 난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 여기기로 했다.




버스도 없고, 지하철도 없어.


거짓말. 정말이지 싫었다. 인도의 수도라는 델리는 더웠고, 더할 나위 없이 시끄러웠으며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바가지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신 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인자한 나의 나라에선 투표소를 제 2 도시 어디쯤에도 만들어 두었으나 나는 결코 가깝지 않았다. 수도의 주말은 이방인에게 잔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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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는 가격과 등쌀에 밀려 한국 영사관 가는 길을 묻다 포기할까 싶다. 내가 찍은 표 한 장이 뭐 얼마나 영향이 있겠느냐만, 이렇게까지 돈을 쓰며 내가 가야만 할까. 나도 요즘 사람들이 으레 하듯 인증사진 따위를 인터넷에 올리거나 하기 위해 가는 욕심은 아닐까. 한참 동안 가지 않을 이유를 찾다가 이내 절레절레, 길을 찾는다. 가장 가까운 전철역, 버스 노선까지. 땡볕은 하염없이 나를 찌르고.


버스기사가 내려주며 가리키는 손가락을 본다.

저쪽으로 삼십 분만 더 걸으면 돼.

그는 싱긋 웃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물과 믹스커피.


투표용지가 얼어버릴 만큼 시원한 에어컨이 있었다. 땀이 식어 차가운 몸에 커피를 마셨다. 어느 영문인지 취소된 후보가 있다는 정보와, 선거인 명부 따위를 살폈다. 긴 걸음이 무색하게 금방 끝난다. 여권을 본 뒤 이름을 확인하고 컴퓨터에 이름을 적으면 나를 위한 투표용지가 나온다. 도장 두 개만 쾅쾅 찍으면 내가 할 일은 끝. 투표지를 고이 접어 통에 넣고 나면 집에 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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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앉았다. 이십 년을 인도에 계셨다던 영사관의 어르신이 말을 건다. 여행 중이에요. 어디에 살고 있냐는 물음에 다만, 그렇게 말했다. 노인은 이어 스무 해라는 시간 동안 생긴 온갖 무서운 일을 이야기한다. 여행 중 사고가 난 일들, 위험했던 일들. 겁을 주려는 걸까. “지금도 여행하는 친구들이 많을 거예요. 아마 정말 많을 텐데..” 노인은 잠시 말을 삼켰다.



“.. 그러니까, 와 줘서 고맙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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