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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방인

배낭 속 세상

고이 접어 넣은 전생의 업보.

by 박하


짐 좀 버려야겠다.


그 말 벌써 몇 달째인 줄 알지? 괜히 쏘아붙인다. 출발하기 전부터 꼭 필요한 ‘잇 아이템’을 물어봤던 것 같다. 귀마개랑 안대.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어이없는 표정은 어째서인지 알고 있는데, 진짜 귀마개랑 안대. 괜히 물어봤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한숨을 뱉고 다시 짐을 싼다.


캐리어는 예외로 둔다. 양말이나 속옷은 옷보다 많아야 한다는 흔한 지론 따위가 누군가의 가치보다는 뒤떨어지니까. 캐리어에 소주나 쥐포, 라면을 한 가득 담아야 하는 사람이라면. 빼어난 슈트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여행이라는 단어보다 관광, 비즈니스에 어울리는 캐리어가 고까워 그런 것도 한몫한다.


DSC03432.jpg Sinuwa, Nepal. (2016)


배낭 안의 살림살이가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열기 전까진 모른다. 미니 밥솥까지도 봤는데, 숭늉을 갈아온 봉지를 봤을 땐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 가정집에서도 잘 안 쓰는 거대한 크기의 샴푸통이 배낭에서 불쑥 나올 때, 온갖 화장도구와 마스크 팩이 나올 때, 정말 흥미롭다. 어떤 이유인지 짐작이 가지만.






배낭에서 곰인형을 꺼낸다.


아니 도대체 저게 뭘까. 참견할 자격이 없긴 해도. 오래되고 낡은 곰인형은 원래 흰색이었을 게 분명하다고 느꼈다. 난 알아내야 했다. 마추픽추 앞까지 들고 와야 했을 거대한 곰인형의 용도는 어떨지. 저녁을 만들며 말을 걸어보니 그녀는 호주 사람이었다. 저녁 식사로 시리얼을 말아먹는 것은 곰인형보다 덜 이상했기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상한 게 아니진 않느냐는 생각이 얼핏 든다. 결국 호기심을 못 이겨 물어봤을 때 그녀는 웃었다. 이게 없으면 잠을 못 잔다고.


DSC03052.jpg Uleli, Nepal. (2016)


그런 사람들은 생각 외로 많았다. 지프 택시를 타고 도착해, 사람을 둘이나 써서 이민 가방 세 개를 3층 테라스 방까지 옮기고 나서야 숨을 돌리며 아주머니가 말하길, “이 숙소가 이 동네에서 가장 싸다는 곳 맞죠?” 카드를 치다 말고 서로의 얼굴을 살피다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덧붙여 그 짐 속에 텐트는 없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이다.


짐을 많이 가져온 사람이 죄를 지은 건 아니나, 그 짐들을 원수로 여기는 경우는 많이 봤다. 쓰지도 않을 물건을 왜 가지고 왔는지 알 수 없는 그 ‘저장병’. 혹시나 쓰지 않을까 싶었다는, 선조들의 유비무환을 기꺼이 따르는 이들이여. 그들은 한 달, 두 달이 지나 여행을 마치고 배낭을 정리할 때,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 물건들을 배낭에서 발견하고 만다.


‘내가 이걸 왜 가져간 걸까.’




정말 고생이 많아.


짐이 무거워 휘청거린다면, 가녀린 팔목쯤 잡아 줄 수 있어. 그런데 그건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들어줄 생각은 없으니까. 특히나 여기 인도에 가져온 짐은 전생의 업보라잖아. 그런 의미에서 업보 좀 줄이는 게 어때. 깐죽거리는 나의 말투에 쏘아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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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린 집을 한 채 여기에 넣고 다니는 거라고 말했다. 사람이 사는데 그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하진 않다고 깨닫는 방법. 나에게 꼭 필요할 것 같았던 물건을 한 달이 지나 꺼냈을 때의 느낌이란 그런 것이라고. 켜켜이 먼지가 쌓였으면 좋으련만, 그렇지도 않은 것을 여태 들고 다닌 게 억울한 마음까지 든다고. 있으면 좋겠다고 여긴 물건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물건은 아니라는 걸.


그러나 예쁜 원피스, 미니 체스판 혹은 십자가 따위가 누군가의 배낭에 들어있었으면 한다.


그런 이율배반적인 물건 하나쯤 넣어둘 공간은 언제나 있다.

아무리 가벼워져도 언제나 무거울 우리의 배낭 속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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