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책을 출간한다.
SNS에 올라온 소식에 배가 아프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못된 심보인 걸 보니 나는 소인배라고. 그렇게 탓을 한다. 쿨하고 멋진 응원자 역시 되지 못한다. 나이가 들어 돈으로 밀어붙인 출간이 아니라면 더욱 샘이 난다. 여행기나 포토에세이 같은 걸 보면 뒤지지 않을 실력이라 자부하면서 왜 성공하지 못하느냐에 대한 끝없는 자학.
‘내 앞엔 반드시 누군가 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말이 과연 패배주의일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1등을 빼고 모두가 불안한 삶에서 경주마가 된 꼴이니까. 그래서 우린 패자에게 손뼉 칠 여유가 없다. 승자에게 쳐 줄 박수도 턱없이 부족한 탓에. 여기에 관중은 결코 없다. 경주마를 구경하러 온 경주마들만이 남았다.
누가 4등이야?
해맑게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국기가 올라가고 국가가 흘러나올 때, 그 순간 4등은 기억에서 사라진다. 금방까지 보던 3,4위 전에서 스쳐 지나간 그 이름은 아무개일 거야. 아무개는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들어갔겠지. 조금 오래 걸릴 거야. 잠깐 울고 있을지도 몰라. 옷을 오래 갈아입는 것이라 생각해야지. 그렇게 아마 시상식이 끝나고서야 모습을 보일 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내버려둬.
그런 거 몰라. 그렇게 채널이 돌아가면 거기서 끝.
금, 은, 동.
<아깝게 떨어졌을 거야.> <4년을 준비했는데.> <감동의 드라마.> 올림픽에 대한 여러 말들이 들려온다. 그 말, 말, 말. 공중파에서 중계 수익이 얼마니, 그런 이야기를 듣다가 배구 경기를 본다. 러시아에게 아쉽게 패배한 그 뒤로 여자 탁구 선수가 패배한 소식을 인터넷에서야 듣는다. 16강의 탁구는 그 시간, 중계조차 되지 못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어느 개그맨이 만든 유행어는 결국 다큐멘터리가 되었기에. 더 이상 웃을 수가 없다. 목에 메달을 걸지 못한 이상 조용히 귀국을 해야만 하는 국가대표도 마찬가지라는 걸. 인생사 다 똑같다는 걸. 우리는 경쟁 사회에 살 수 있고 더 이상 4등을 사랑할 수 없게 되어버린 탓이다.
이기기 전까지의 그 기대는, 4등이 될 사람에게 기대를 불어넣게 되고 숨을 쉬게 하는 것. 그 열광을 보낼 곳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마치 그것이 하나의 긁지 않은 복권처럼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면 이기지 못한 것에 대해 비난하고 열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 나는 그 복권을 긁지 않은 채 행복해야지.